자주는 아니지만 어쩌다 술 먹고 늦게 잔 다음에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늘 비슷하다. 근데 이 날은 5시에 잠깐 깼다가 언제 다시 잠든 지도 모르게 잠들고, 눈 떠보니 7시 반이었다. 긴장을 하지 않고 편안했다는 증거다. 아주 드물게 있는 일이라 기분이 좋았다.
아침 산책을 나가면서 아파트 복도 창으로 본 동네 모습
염치없이 감사하게도 아침밥까지 잘 얻어먹고선 멘토링을 하러 가는 청년을 따라나섰다. 가는 길에 조금 미묘한 마음도 들었지만 최대한 쓸데없는 걱정 안 하고 편하게 있어봤다.
청년의 블로그에서 보던 장소에 도착했다. 블로그로는 청년 센터의 얼굴만 본 셈이었는데 직접 가서 몸통까지 다 보게 되었다. 이제는 건물의 얼굴만 보더라도 뒷모습까지 떠올릴 수 있게 됐다는 게 재밌다. 비슷한 면에서 블로그나 글로만 보던 곳에 직접 가는 일도 신기했다. 타인이 주인공인 이야기책 속으로 뛰어드는 모험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토끼를 따라간 엘리스나, 자라를 따라간 토끼가 된 것 같은 너무 재밌는 기분. 인생 10년의 공백으로 모르는 곳, 모르는 것이 많은 덕분이지 싶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헤엑" 소리가 말 그대로 절로 나왔다. 너무 깔끔하고 넓었다. 가까운 곳에 이런 데가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할 동안 청년은 바로 멘토링을 시작하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청년이 멘토링을 할 동안 나는 내부 구경을 한 후 마음에 드는 칸을 골라 빈백에서 책을 읽었다. 이 시간을 위해 굳이 챙겨 온 책이었지만 읽다가 많이 졸았다. 가장 안전한 수면제는 책이 아닐까? >,.< 데헷
흠.
그리고 멘토링 끝나서 점심 먹으러 갔다. 오랜만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 사장님이 굉장히 친절하셔서 인상 깊었다. 식사를 하면서 또 여러 가지로 전날 못했던 대화를 많이 나눴다. 상대방이 예상 못한 내 모습도 보여주게 되고, 나도 생각 못한 청년의 모습을 알게 되기도 하고 그랬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건 '진전'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밥값을 내주셨는데 너무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 아닌가 걱정도 들었지만 "서울 가면 사주세요." 하시길래 '아 그러면 되겠다.' 하고선 생각을 길게 가져가지 않았다.
밥을 먹고 PC방에 갔다. 오랜만에 내 분신을 만나니 반가웠다. 롤은 집에 있는 동안 워낙 질리도록 많이 했어서 이제는 하지 않지만 최애 스킨을 입은 나의 작은 티모를 보고 있자니 너무 귀여워서 흥분되고 예전 일들이 생각났다. 상자에서 나온 나의 첫 티모 스킨이었던 '판다 티모'와 형이 자기 계정 정지 먹고 내 계정에다가 충전해서 자기 스킨 사고 남은 RP로 산 '꿀잼 티모'.
아 귀여워
티모와 티모 유저는 혐오의 대상이다. 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어느 정도냐면 티모를 고르면 그것만으로 아군이 게임을 지게 만든다. 나는 그 혐오에 분노하기도 했었지만 장난기 때문인지 동시에 그것을 즐기는 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잘못 퍼진 정설이나 손쉬운 편견의 위험성을 이걸로 배웠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여간 아군과 적군으로부터 동시에 고통받을 수 있는 재밌는 캐릭터다. 숨 쉬듯 억울한 일을 당하고, 멘탈을 키워보고 싶다면 해도 된다. ^오^b
계획된 일정이 모두 끝나고 pc방에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내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비였다. 정류장으로 이동해서 배웅까지 너무 따뜻하게 잘 받고 청년 덕에 무사히 빨간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책 읽기는 버스가 더 좋아 일부러 버스를 타고 청년센터 빈백에서는 조느라 많이 읽지 못했던 책을 꺼내 읽었다. 많이 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