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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토

히키코모리 탈출 일상 기록, 76번째

by 온호

7월 8일 월요일



학식 사진이 두 개인 것을 보니 이 날은 점심도 학식을 먹었나 보다. 학식이 5~6,000원 하는데 냉동 미역국밥이나 볶음밥은 2,000원 정도라서 가급적이면 하루 한 번은 기숙사에서 해결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식비에 조금 아껴서 디저트 살 때 쓴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한다는 경영의 기본 메커니즘을 아주 소규모지만 내 경우에도 적용해 본다. 점심시간에 유치원을 나오면 정면으로 30m 앞이 학생 식당이라서 동선이나 시간까지 고려하면 굉장한 이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날의 특별한 일이라면, 유치원에 마법사가 공연을 하러 왔었 것인, 나는 우리 반 관람 차례에 같이 구경하지 못하고 다른 반 백업을 갔다. 아무렇지 않으려 했지만 뒤돌아 강당을 나갈 때 내 얼굴이 조금 딱딱해지는 느낌이 났다. 나는 조금 서운했던 것이다. '알뜰살뜰하게 쥐어짜내지는구나!', '그게 맞지!'


7월 9일 화요일

화요일-1. 요즘 아침 루틴에 대해


1. 기상 후 침대에서 10~20분 스트레칭


2. 아침 6:00~6:30 사이에 기숙사 헬스장으로 내려가서 운동을 1시간(한 시간이라고 적어야 하지만 가독성이 1시간이 나은 것 같다) 정도 한다. 그리고 요즘은 기숙사 헬스장에서 유치원 근로 장학생 남자 B도 종종 본다. 유치원 남자 근장생 3명이 전부 경영학과인 것도 신기하다. 과에 원체 사람이 많긴 하지만.


3. 오트밀이나 단백질바를 먹는다. ( 과제할 때 연말까지 골격근량 35kg 목표로 적었었는데 1kg 정도는 금방 오를 줄 알았더니 진전이 없어서 최근에는 프로틴 셰이크 구입을 고민 중이다. )


4. 샤워하고 9시까지 학생 식당 가서 밥을 먹는다. 방학이라 급식 시간이 1시간 늦춰져서 정시 출근을 몇 번 하다가 출근 시간을 30분 미루고 아침을 먹고 가기로 결정했다. 30분 치의 보수를 더 버는 것과 내가 아침에 30분을 벌어서 그 시간으로 독서를 하거나 아침밥을 먹거나 하는 것의 효용을 비교해 봤을 때 후자가 더 이득인 것 같다고 판단했다.


+ 아침밥 사진 찍기: 처음에는 천 원 조식이 신기해서 가족 단톡방에 보여주려고 시작했다. "이런 게 있다. 좋지?" 그 이후로는 손목닥터9988 식단 입력용으로 찍었다. 6월 말일에 신규참여 기간이 만료되고 연속참여자로 변경되면서 더 이상 식단 기록 보상은 없지만 관성적으로 찍고 있다. 졸업 때까지 계속 찍어서 모아 놓고 보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5. 9:30 양치질 후 유치원 출근




화요일-2. 기지개 센터 원예활동에 대해



화요일은 기지개센터에서 7월 동안 4회로 계획된 원예활동이 있는 요일이다. 이번 주는 향초 만들기를 했다. 향초 만들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 제끼고 유치원 풀근무를 하려고 했는데 안내에 혼선이 있었는지 원래 예정된 비누 만들기가 아니라 향초 만들기를 했다. 일이 그렇게 진행된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일단 기숙사에서 향초 사용을 못한다. 그래서 향초 만들기 활동을 할 시간에 일을 해서 돈이나 버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서서 향초 만들기는 건너뛸 생각이었다. 근데 활동 순서가 안내와 다르게 뒤바뀌는 바람에 내 계획이 어그러진 셈이다. 내가 J 선호도가 낮기는 하다지만 이럴 땐 가끔 J모먼트가 발동한다. 만든 향초는 부모님 집 갈 때 식물들 몇 개랑 같이 드리려고 한다. 창가가 포화상태라 식물도 처분해야 한다.


지금은 혼자라서 괜찮지만 2인실 창가에 화분을 저렇게 많이 둘 순 없다.


원예활동이 끝나고 유일하게 이번에 함께 참여 중인 '날씨요정' 청년과 함께 '운동인' 청년이 추천하는 카페에 가보았다. (다들 개성이 뚜렷하시다.) 추천인 본인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의미 있다 생각하지만 여러모로 저어 되어 그러진 못하고 새로운 기회가 닿아 가게 되었다.


입구의 조용해 보이는 느낌과는 다르게 대기가 있었다. 대기석에서 카페의 사진을 찍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니 다행히 2층에 금방 자리가 나서 앉을 수 있었다. 옛날 음악실 같은 인상이 들었는데 나는 그게 굉장히 좋았고, 다락방 같은 2층의 느낌도 좋았다. 천장이 낮았던 외갓집 2층과 비슷해 무언가 그리워지는 느낌도 있었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 중인 청년의 다음 일정 시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여가를 즐겼다. '화요일은 이 분과 친해지는 날인가 보다.' 생각하니 프로그램 순서 안내에 착오가 있었던 것도 괜찮다고 넘어가졌다. 또, 햇반과 커피와 말차를 주셨는데 그래서 햇반과 먹을 반찬도 사고, 말차에 탈 우유도 샀다. 드립커피는 향도 너무 좋고 맛도 부드럽고 고소해서 이거 사서 아침에 마실까 생각 중이다. 덕분에 요즘 식생활이 다채로워졌는데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나오는 길에는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지나던 이'가 남긴 시를 발견했다. 문화 예술의 동네 아니랄까 봐. 멋지다.


화요일-3. 기숙사 사감쌤과의 술자리에 대해


날씨 요정 청년과 헤어지고 돌아온 저녁에 오랜만에 기숙사 관리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학생들이랑 가끔은 차에서도 술을 마신다고 하시더니 이번엔 내가 그 멤버가 된 것이다. 평소같으면 자고 있을 시간에 술을 마시는 것이 생활 리듬과 건강에 좋은 영향을 줄리는 없기에 망설여졌다. '내일 아침에 출근도 해야 하는데.' 하지만 어쩌다 한 번이기도 하고, 전에는 그토록 바랐던 일에 대해 더 이상 큰 흥미가 동하지 않는 내 심정의 변화도 너무 정 없다 싶어 즐겁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운전석에는 사감 선생님, 조수석에는 조리학과 1학년 여학생, 오른쪽 뒷좌석에는 조리학과 1학년 남학생 한 명과 함께 총 4명이 소주와 치킨을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님은 "학생들 간에 네트워크를 가졌으면 한다."는 취지가 있다고 자리를 소개하셨다. 결과적으로 마지막쯤에는 조리학과 1학년들과 인스타 맞팔을 하긴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밤, 아주 쓸모 있는 소득을 하나 건졌다. 나 다음으로 차에 먼저 도착했던 여학생과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나이 얘기와 전에는 무얼 하셨냐는 화제가 여지없이 나왔고 내가 뭐라 설명하려고 하는 중에 선생님이 "좋은 얘기만 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런 경우에 "좋은 얘기만 했으면 좋겠어요."라는 식으로도 대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좋은 얘기만 해" 정신을 써먹어야지.


소주를 예닐곱 잔 정도 마시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서 대화도 나누다 보니 즐거웠다. 나는 같이 수다 떠는 걸 확실히 좋아하나 보다. 좋은 술자리의 마무리에서 느낄 수 있는 인스턴트 인류애와 함께 인사를 나눈 후, 방으로 돌아왔다. 귀찮았지만 세수와 발 씻기를 한번 더 하고 침대로 잠겨 들어갔다.


7월 10일 수요일


아침에 학식 먹으러 가는 계단. 공사 자재 같은 걸 두는 곳인데 이 날따라 이상하게 유럽스럽게 보였다.

출근하기까지는 언제나와 같고, 퇴근해서는 기숙사가 아닌 동대문으로 곧장 향했다. 큰 누나와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장소는 각자의 집에서 중간쯤이기도 하고 내가 좀 더 자주 다니고 싶어 하는 곳인 중앙아시아 거리로 정했다.


러시아케이크를 먹으러 갔다가 푹 빠진 거리다. 사람 많지 않고, 거리가 광범위하지 않고, 내 기준에서 재밌게 느껴지는 요소가 많아서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스타사마르칸트, 케밥집 타슈켄트를 갔었는데 이번에는 누나가 검색해 본 곳으로 갔다. 사마르칸트라는 이름의 매장이 곳곳에 굉장히 많은데 일부는 같은 분이 운영하시는 곳인 것도 이 날 알게 됐다. 올초부터 이 곳의 '사마르칸트'들을 모두 가보고 싶어 하는 욕구를 느끼고 있는데 그래도 이제 제법 몇 군데 가보긴 했다.


큰 누나는 요즘 부모님 생각에 심정이 복잡하다. 나는 부모님이 20년 넘게 산 집에서 이사하는 과정을 함께 겪으면서 우리 가족의 먼지 쌓인 인생과 세월을 마주하다가 한 번 정통으로 영혼이 얻어 맞았다. 부모님께, 엄마에게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내 죄가 밀려와 버틸 수가 없어서 엎드려서 통곡을 하기도 했다. 누나의 마음이 그때 나의 마음과 비슷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부모님의 남은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하면 결국은 '지금부터라도 잘하자.' 라는 답 이외에는 내릴 수 없다. 내가 행복해진 모습을 보여드리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부모님을 사랑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한다.


식사를 하고 나와서 임페리아 마트 구경도 하고 저번에 동갑 청년과 나눠먹었던 프랴니키도 찾아봤다. 임페리아 마트에는 원래 프랴니키가 놓여 있던 자리에 다른 것이 올려져 있었고, 다른 마트들에서는 프랴니키의 가격이 전반적으로 오른 것 같아서 사지 않았다. 사놨다가 기숙사에서 말차라떼를 만들어서 간식으로 같이 먹으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아쉬웠다. 대신 러시아케이크에서 사워크림 메도빅을 사서 설빙 가서 인절미 팥빙수랑 같이 먹었다. 요즘 나에게 계산하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큰 누나랑 먹은 거를 내가 낼 수 있었다. 돈키호테 2권에도 아마 산초가 했던 말 중에 "자기가 내야 편하게 먹는다."라고 하는 뉘앙스의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도 그게 좀 더 편한 것 같다. 워낙 앞에 음식이 있으면 가만 놔두지 못하고 먹어 없애야 하는 성미라서 그렇다.


헤어질 때, 누나는 굳이 한 역 더 걸어서 나와 같은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개찰구 앞에서 누나의 어깨를 두 번 주무르면서 "누나 잘 가고."했다. 누나 동네인 청파동에 있는 골목식당 촬영했던 수제 햄버거집을 다음에 같이 가자는 약속을 하면서. 스크린도어를 오른쪽에 끼고 누렇고 쓸쓸한 플랫폼을 걸으며 누나가 평안하길 바라보았다. 이번 달 말에 큰 누나와 같이 본가에 내려갈 것 같으니 그 때도 잘 지내야지.


우연히 의정부 헌혈카페에서 헌혈했던 이후로, 6월 달에 전혈 3회가 채워져서 받았던 사은품 가방인데 사용 하루 만에 터져버렸다. 가방에 물건을 너무 많이 넣어서 혹사시키긴 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단번에? 큰누나랑 본가 갈 때 가져가서 엄마한테 꿰매달라 해야겠다. 엄마가 좋아하실 것 같다.


7월 11일 목요일



해마 건강에 지난 일들을 자꾸 기억해 보는 게 좋다는데 목요일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청년이 준 말차를 음용법대로 먹기 위해 믈레코비타 멸균우유를 기숙사 편의점에서 샀던 기억은 난다. 우유를 사기 전에는 물만 타서 먹던가, 마침 사 마시고 있던 '자판기 우유맛 한잔' 스틱과 섞어 먹어도 봤는데 우유에 타먹는 게 가장 맛있는 것 같다. 멸균우유는 편의점에서 할인을 하고 있어서 2,000원이 살짝 안 됐는데 굉장히 싸다고 느껴졌다. 우유가 너무 비싸다. 유치원 고슴도치도 뭘 열심히 마시고 있다. 퇴근하면서 저렇게 활동하고 있는 고슴도치를 본 것은 이 때가 처음이어서 찍어놨던 기억.


7월 12일 금요일

금요일-1. 아침에 캠퍼스 산책을 하면서 한 생각

1. 뭔진 몰라도 성의 있는 글쓰기를 위해 뭔지 찾아본 결과, 이세계아이돌이라는 국내 버츄얼 걸그룹의 멤버 릴파의 단독 콘서트 배너였다. 평화의 전당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에서 저걸 보면서 마음속에 한 아저씨가 '사이버가수는 보디가드는 필요없겠다이?' 같은 소리나 하는 걸 들었다. 그런가?


2. 대학원 건물 뒤에 있는, 얼마 전까지 말라서 바닥만 보이던 작은 연못 주변으로 모래주머니를 쌓아놓았다. '장마철에만 볼 수 있는 학교 풍경이겠지.' 하며 남겨놓았다.


3. 학교 곳곳에는 영역을 나눠가진 고양이들이 있다. 고양이를 보며 '캣맘은 정신병인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내 바로 아래이자 우리 집의 막내인 여동생은 가끔 고양이 밥을 준 이야기를 하고, 고양이 사진을 보여준다. 내 바로 위이자 우리 집의 장남인 형은 한때 "개 키우는 여자들 애정결핍이다."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고 캣맘은 말할 것도 없이 정신적으로 결함 있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나는 둘 사이에서 또 이도저도 속하지 못한 회색분자가 되어버린다.


금요일-2. 퇴근 후 드디어 머리를 잘랐다

6시 퇴근과 미용실 예약 시간 7시 사이에 기숙사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 싫어서 같이 일하는 A에게 저녁 먹을 만한 데 좀 알려달라 했다. 그랬더니 학교 앞 '진키친x밤엔,술집'이라는 일식당 이름을 정확하게 읊은 것을 뿌듯해하며 가라아게 정식(8,900원)이 맛있었다고 추천해줬다. 좋았다. 음식도 맛있고, 나갈 때 문 옆에 걸려있는 치실과, 사탕, 껌이 입주한 3층짜리 아파트도 아기자기하고 사장님의 섬세함이 느껴져서. 그런 수납 주머니를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식사를 하고 예약한 미용실로 갔다. 예전처럼 그냥 지나가다 들어가서 기다렸다가 짜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시대가 변해서 이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스네이프 교수 머리'가 하고 싶어 져서 머리를 기른 이후로 오랜만에 짧은 머리로 돌아왔다. 머리를 단정하게 하려면 자주 깎아야 하고, 그러는 게 돈이 좀 아까워서 기른 것이기도 하다. 과거엔 밖에 나가지 못해서 집에서 내가 머리를 자르기도 했었다 보니 더 아깝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머리를 자른 일과 관련해서는, 디자이너 분이 지금까지 만나본 미용사 중에 가장 인간적으로 많이 끌렸던 게 인상이 깊었다. 남자분이셨는데 굉장히 편안하게 응대를 해주시고, 머리를 하는 동안에도 불편할만한 이야기를 전혀 안 하고, 태도에서 엄청 섬세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통 내가 뜬금없이 웃거나 미소 짓거나 하면 왜 그러는지 잘 모르는데 이 분은 내 낌새를 잘 아시고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 정확한 말을 하셨다. 친구들 중에도 그런 친구는 거의 없었다. 이 사람과 성향이 굉장히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용사분이 '머리를 자르니까 잘 생겨졌다.'라고 말할 거 같아서 대답으로 '선생님이 잘해주셔서 그런 거죠.'라고 하면 되겠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 자르니까 잘 생겨지셨는데요?" 하시길래 준비한 대로 "선생님이 잘 잘라주셔서 그런가 봐요."하고 웃었다. 선생님도 웃었다.


작업이 다 끝났을 때, 가운을 벗으면서 "엄청 섬세하게 잘라주시고, 응대도 편안하게 해 주셔서 너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서후 디자이너는 "오랜만에 짧은 머리 하시니까 더 예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그랬다."고 생각지도 못한 따뜻한 말을 해줬다. 혹시 이 분도 이 대답을 나처럼 미리 준비하시진 않았을까? 분명한 건 평소에 머리 자르던 비용보다 조금 더 비싸긴 하지만 아무래도 다시 갈 것 같다.


머리를 자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히키코모리 경력이 10년이나 되기 때문에 머리 손질하고 다녀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10월 5일에 형이 결혼을 하는데, 결혼식에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의 동생이고 싶어서 미리 머리 손질 연습도 해볼 겸.

2. 남자선생님이 머리가 기니까 유치원에서 애들이 자꾸 머리 가지고 귀찮게 한다. 피에로 같다고 하고, 앞이 안 보이는 거 아니냐고 하고, 헝클어뜨리고.

3. 앞이 안 보인다.

4. 덥다.


7월 13일 토요일

토요일-1. 에그타르트 원데이 클래스


동대문구 '동일이의 동네친구' 동아리 활동 지원사업 모임이 있는 날. 연남동의 '감성버터'라는 곳에서 에그타르트 원데이 클래스를 했다. 11시 수업인데 기숙사에서 9시 반에 출발해야 했어서 출발할 땐 거리가 먼 것에 불만을 품었다. 선물 같은 하루를 보내고 다시 보니 멀었던 것이 굉장한 행운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네이버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가던 중, 한 번 꺾어야 하는데 와서 보니 그 꺾는 길이 지하보도였다. 그대로 내려가려는데 지하보도가 뭔가 예뻐 보여서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 유독 마음에 든다. 일상 속에 그냥 지나갈 법한 이런 예쁜 것들이 좋다.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연남지하보도" 글씨체가 예쁜 걸 발견했다. 그리고 글자뿐만 아니라 아마 표지판의 위치나 배경과의 색감 조화 같은 것들이 예뻐 보이는 인상을 자아냈던 것 같다. (내 눈에만 그런 것은 아니지 싶어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유명한 곳이었다.)



솜씨당 부부작가님들이 수업을 굉장히 친절하게 잘 진행해 주셔서 편안했다. 그리고 수강생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특히 만족스러웠다. 내가 만들러 왔는데 선생님이 미리 다 해놓거나, 시범이랍시고 선생님이 실시간으로 다 해버리는 지난번 마카롱은 정말 여러모로 아쉬웠다.



에그타르트가 오븐에서 구워지는 동안 아내 작가님이 엽서 카드와 펼친 책만한 크기의 철제 색연필 통을 나눠주시며 "그림을 그려보세요."하고 말했다. 나는 내가 그림을 그리면 스캔이든 아니면 카드째로든 포장 박스에 들어가는 줄로 상상했다. 그래서 '너무 신기하다, 너무 재밌겠다.' 싶어 열심히 토끼를 그리던 중 알았다. 에그타르트가 오븐에 들어가 있는 동안 기다리면서 심심하지 말라고 준 것이라는 걸. 나는 기술적인 기대가 컸나 보다.


전날 유치원에서 일찍 하원하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빠지고 여유가 찾아오는 시간대에 하율이가 토끼를 그려달라 했다. 그리고 그때 고객님을 만족시켜드리지 못하고 실망한 표정을 짓는 아이를 봐야만 했다. 그래서 이때 그림을 그리라는 작가님의 말에 토끼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으로 토끼 이미지를 고르던 중 뉴진스 토끼에 유니폼을 입히거나, 커스텀을 하는 밈이 있길래 나는 '빵을 좋아하는 토끼를 만들면 되겠다.' 구상을 마치고 토끼를 보면서 따라 그렸는데 결과물이 귀여워서 마음에 든다. 토끼의 모습에 빵을 만들어 먹으러 달려가는 내 마음이 투영되어 더 귀엽다. 그러고 보니 모루인형도 토끼를 골라서 만들었었는데 내가 토끼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토요일-2. 청년들과 소소하게 편안하고 행복한 휴일을 보냈다

에그타르트를 만드는 내내 자조모임 단톡방에 "저 지금 연남동인데 에그타르트 드실 분?"하고 말해볼지 고민했다. 베이킹하러 와서 생각해 보니 근처 사시는 청년 분도 계시고, 멀리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도 아쉬웠다. 저번에 밥을 사주신 청년에게 갓 구운 에그타르트를 선물해도 너무 좋을 것 같았다. 비스코티 만들었을 때랑 마카롱 만들었을 때는 청년이나, 가족들과 나눠 먹었는데 그건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인생의 한 모습이다. 집에서 내가 구운 쿠키나 빵을 예쁘게 포장해서 친한 사람들에게 선물한다거나, 차를 곁들여서 함께 나눠먹으며 대화하는 여유가 있는 인생.


모임에서 먼저 만나자고 말을 꺼내는 이런 일에 대해서 다른 청년들이 가지는 걱정이나 생각도 많이 듣기도 했고, 거절에 대한 리스크라든지, 오래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나 스스로도 여러 차례 배웠기 때문에 이번엔 용기를 냈다. 써놓은 메시지만 여러 번 다시 읽어보다 지우던 날들을 뒤로한 채 에그타르트가 오븐에 들어간 시점에서 두 번만 다시 읽고 과감하게 보내기를 눌렀다. 단톡방 반응이, 두 명 정도는 "못 가서 아쉽다."라고 하셨고 다른 세 명 정도는 "에그타르트 잘 만드셨네요~." 류의 칭찬을 해주셨다. 그리고 다행히 실질 타겟이었던 청년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타이밍이 잘 맞아 같이 놀 수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베이킹이 끝나고 내려오니 골목에 청년이 기다리고 계셔서 놀랐다.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없었어서 이미 오신 줄도 몰랐고, 너무 더운데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모습에 미안했다. 이 분은 이 날 먼저 만나기로 약속했던 다른 청년분이 계셨는데 나도 끼게 되었다. 그래서 원래 정해진 약속 장소로 이동을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운도 좋은 부분이 있어서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운만 아니라 "Thanks for having me." 이기도 하고. 상대방의 호의가 없었다면 없었을 일이기도 하다.



만나기로 한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것 같아서 조금 눈치 보이는 마음도 있었는데 '불편한 만한 것이 있으셨으면 어련히 알아서 안 부르셨겠지.'하고 두 분을 믿고 편하게 합류했다. 이런 부분을 배우고 연습하려고 노력 중이다. 다른 청년 분이 사시는 동네의 맘스터치에서 만나기로 하셨다고 해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가는 길에 버스 창문으로 거리를 보면서 벚꽃 시즌에 모임 장소였던 곳들을 찾아 되짚으며 함께 추억했다.


아트박스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청년분과 합쳐서 점심 장소인 맘스터치로 걸어서 이동했다. 청년이 사는 동네를 구경하면서, 동네와 관련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니까 역시 재밌고 좋은 기분이 들었다. 맘스터치를 온 김에 히키코모리 시절 좋아했던 메뉴인 치파오 순살을 주문했다. 히키코모리였기 때문에 치파오에 대한 기억도 추억이라고 불러도 될지 양심에 좀 찔리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래도 추억이 맞는 것 같다. 학교 정문 거리에도 맘스터치가 있어서 작년 2학기 재입학 이후 볼 때마다 치파오 생각을 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사 먹지는 않았다. 굳이 그 때 기억을 꺼내 먹고 싶진 않았나보다. 이 날은 두 분이 계셔서 그런지, 나눠 먹을 생각과 추억 여행 겸 샀다. 정작 두 분 다 치파오를 거의 드시질 않아서 내가 배부르게 먹어버렸다. 오랜만에 먹어도 맛있긴 맛있었고 뭔가, 뭔가 기분이 좀 이상했다.


"뭔가"라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고 덮어놓고 싶었지만 다시 읽어보다 마음을 바꿔먹고 왜 기분이 이상했을까 생각해 봤다. 분명 어떤 의미가 느껴졌었다. 히키코모리 시절 아주아주 가끔, 어쩌다 집에 부모님이 두 분 다 동시에 안 계시는 날 컴퓨터 책상에서 혼자 먹던 힐링 푸드를 사람들 있는데서 먹어서 그런가 보다.


만났을 때가 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어서 배가 고팠기 때문에 주문한 음식 나오기 전에는 내가 만든 에그타르트를 나눠 먹기도 했다. 근데 상당히 맛있어서 놀랐다. 지금까지 원데이 클래스하면서 만들었던 것 중에 제일 고급스러운 느낌의 결과물이었다. 이 집 레시피가 좋은가보다. 그동안 만들었던 휘낭시에, 마들렌, 비스코티, 마카롱도 물론 맛있었지만 약간 저렴하고 재료를 아낀 공장형스러운 느낌이 조금씩 있었다. 원데이클래스 작가님 스튜디오에서 나올 때 "갓 나온 에그타르트 먹을 수 있는 경우가 잘 없어요."라는 말을 들으면서 닭이 갓 낳은 에그타르트나 상상했었는데 먹어보고 나서야 그런 말을 하신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진짜 맛있었다.


먹을 걸 다 먹고 맥도날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같이 가서 먹었다. 그걸 또 사주셔서 감사했다. 남자 청년분은 마라톤을 준비 중이시기도 하고 건강 생각하셔서 후식은 건너뛰셨다. 이 날 나만 제대로 치팅한 거 같다.

원래 두 분이서 토요일에 계획한 일정이 보드게임방을 가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엉겁결에 난생처음 보드게임방에 가게 되었다. 딱 일주일 전 시흥 청년의 집에서 보드게임에 대한 좋은 기억을 쌓은 상태여서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었다. 두 분이 하고 싶으셨다던 다빈치코드를 첫 게임으로 했다.

난 이 게임을 부모님 집에서 같이 살던 시절에 부모님과 큰 이모와 가끔 같이 했었다. 매형이 본인이 재밌게 했었다며 조카들 오면 같이 하라고 사놓고 갔어서 집에 생겼던 게임이다. 엄마는 아마 치매 예방에 도움 될까 하는 생각으로 이 게임을 같이 하자고 자주 그러셨는데 나는 그런 엄마 모습 보기가 애처로워 힘들고, 귀찮고 재미없어서 하기 싫다고 많이 내뺐다. 그리고 아빠가 이걸 나보다 훨씬 잘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또 나의 추억이 있는 것을 친구들과 함께 해보게 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두 번째 게임으로 시흥청년 집에서 새벽 1시 넘어서 했던 'What's it to ya'를 했다. 이번엔 내가 게임 소개를 하는 입장이었는데 보드게임에 대해 순도 100% 초심자인 만큼 역시나 제대로 진행하지 못해서 죄송했다. 그래도 서로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져서 나쁘지 않았다.


세 번째 게임으로 '꼬치의 달인'을 했다. 인기게임인지 매물이 없어 못하고 있다가 마지막에 할 수 있었다. 예전에 런닝맨에서 이 게임을 하던 걸 봤었는데 직접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이게 제일 재밌었다. 1차원적인, 순수 재미가 발군이었다. 세 사람이 꼬치 주문의 유형에 따라 강점이 뚜렷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도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 게임을 하다가 문득, 오후 햇살이 비치는 창가 방에서 사람들과 깔깔거리며 게임을 하며 휴일을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나는 행복했던 것이다.


나올 때쯤엔 보드게임방에서 4시간이나 보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계획된 일정이 끝나서 "다음은 어떻게 하실래요?"라는 말에 저녁도 같이 먹으러 가고 싶었지만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 늦어지면 힘들 것 같아서 "저는 이만 집으로 가보겠습니다."하고 우물쭈물 말했다. 청년들이랑 만나면서 이 말을 해본 건 내 기억으로는 처음인 것 같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다음 날인 일요일에는 해가 뜨거워지기 전 아침에 용마산-아차산 트래킹을 할 계획이기 때문에 휴식도 충분히 취해야 했다.


두 분께 인사를 드리고 지하철역 출입구로 들어갔다. 기숙사에 도착해서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면서 '오늘도 너무 내 말을 많이 했네. 좀 잘 들어드려야 할 텐데, 다음엔 조용히 있자.'는 매번 해도 소용없는 다짐을 또 했다.

기숙사 휴게실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전자레인지를 2분 돌리는 동안 창 밖을 바라봤다. 창문에 때가 많이 꼈지만 석양빛을 받은 구름이 성운 같아 아름답게 보였다. 좋은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2시간쯤 후에는 청년 분이 카톡을 보내왔는데, 거기에는 내가 기숙사 계단을 올라오며 했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이 적혀 있었다. 웃겼다. 마무리 인사가 반복되면 어색할까 봐 나도 그랬다고 대화를 이어 붙이진 않고 넘어갔지만 내가 이 모임의 사람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것에 있음을 분명히 느껴,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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