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학교에 재입학한 이후로 히키코모리 탈출 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일환으로 이곳저곳 혼자 많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남산도 간 적이 있었는데, 전망대 안내판에 표시된 산들을 실물과 연결시키며 하나하나 짚어가며 보다가 '여기 한 번씩 다 가봐야겠다.' 하는 목표를 세웠었다.
올해 초, 혼자가 아니라 자조모임 청년들과 함께 남산을 다시 찾았을 때 혼자 왔던 날의 결심을 생각하며 찍은 사진
불암산, 북한산은 청년들 등산모임으로 갔었고, 안산, 낙산은 청년들과 얼굴 보는 모임 중에 함께 갔었다. 아직 남은 산이 너무 많아서 여유 있는 이번 여름 방학 동안 주말에 부지런히 다니기로 생각했고, "쇠뿔-단김" 차원에서 2주 전 토요일에는 인왕산-북악산을 혼자 다녀왔다. 지난 주말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건너뛰고 이번 일요일에는 용마산-아차산을 갔다 왔다.
버스를 타고 내려서 용마폭포공원도 구경해 볼 겸 걸어가는 길. 색깔이 예쁜 계절이다.
저번처럼 단백질바 2개와 물을 힙색에 챙겨 넣은 후, 아침 7시쯤에 기숙사에서 출발했다. 2개를 챙긴 이유는 점프 뛰어서 코인 먹는 마리오마냥 정상에 오를 때마다 거기에 떠있는 코인(단백질바)을 하나씩 먹는 느낌으로다가 먹으려고 2개를 넣었다. 띠링띠링. 정상 표석을 터치한 후, 작게 보이는 서울을 바라보면서 가방에서 하나를 꺼내먹으면 된다. 여담이지만 단백질바는 운동 후 영양섭취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요즘에 빵을 참고 있어서 그 대용품 간식 같은 느낌으로 먹고 있다. 몸에 덜 나쁜 디저트.
'저런 야외 스포츠클라이밍 경기장을 빌려서 사용하는 절차는 어떻게 될까', '어느 정도 실력이면 저런 걸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트랙을 가로질러 폭포로 향했다. 아쉽게도 폭포의 위용은 감상할 수 없었다.
네이버지도를 보면서 공원에서 용마산 등산로를 찾는데 살짝 헤맸지만 무사히 올라갔다. 그러다 등산 후반부에는 살짝 이슈가 있었다. 분명히 암벽 초입에는 위에서 내려오던 지긋한 누님이 두 분 계셔서 길이 맞다 확신하고 올라갔는데 가다 보니 암벽 경사가 점점 가팔라지고 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일단 조망점 데크가 보이는 방향으로 계속 올라갔는데 나무 데크 아래에 도착하고 보니 올라가는 계단이 없길래 '아 진짜 길 아니었네 어쩐지 무섭더라.' 했다. 다음부턴 '실족할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시점에 귀찮더라도 되돌아가야겠다. 데크에는 페르시아 왕자 매달리기로 올라갔다. 커플이 데크에서 경치 구경 중이었는데 내가 엉뚱한 곳으로 올라오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서 민망했다.
조망점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정상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이 배경에 걸리지 않게 각도를 피해 찍은 용마봉 표석 사진은 모자를 쓴 어몽어스같이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귀엽다.
아차산은 용마봉에서 아차산으로 바로 연결되는 루트로 가면 너무 가까워서 그냥 아예 내려가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내려가는 길도 비주류 루트였는지 (길이 희미하긴 했지만 다행히 길이 아닌 건 아니었다.) 중간에 만난 지긋한 형님이 "여기로도 내려오시는 분이 계시네요?" 했다. 아무래도 등산을 할 땐 네이버맵 추천 경로로 다니면 안 되겠다.
내려오니 아이들 신나서 노는 소리가 시끌벅쩍했다. 긴고랑계곡에 피서객이 몇 있었다.
내려와서 계곡 입구 주차장에서 보니 두 분이서 물을 냉장고에 넣고 계셨는데, 물을 팔고 계신 모양새는 아닌 것 같아서 가까이 가봤더니 "물 받아 가세요." 하셨다. "구에서 나눠주는 건가 보네요? 엄청 좋은데요~"했더니 말을 이쁘게 하니까 하나 더 받아가라 하셔서 두 개를 받았다. 마침 가져온 물을 다 마시고 편의점에 갈까 하고 있던 차에 잘됐다 싶어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 연고도 없는 동네를 맘껏 걸어 다니면서 구경했다. 즐거웠다. 걷다 보니 그래도 옆에 한 명쯤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올라갔다가 일부러 내려와서 다시 올라가는 이상한 짓에 같이 어울려줄 사람은 웬만하면 잘 없겠다 싶어 생각을 고쳐 먹었다. 시지프스 정도 되면 "그래도 돌은 안 굴려도 되니까 이게 훨씬 낫지~."하고 신나서 뛰어올 것 같다.
가는 길에 햇볕이 점점 세져 모자를 하나 샀다. "왕창 세일"인 것 치고는 18,000원이나 해서 아쉬웠다. '테무 같은 데서 사면 5천 원 정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당장 모자를 쓰는 것의 효용이 차액보다 클 것 같아서 울며 겨자 먹기로 샀다. 등산 모자를 미리 사놨다면 베스트였겠다.
아차산 어울림 광장에 도착해 아차산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아차산을 올라보고 한 생각이 있는데 최근 가본 인왕산, 북악산, 용마산, 아차산 넷 중에서 아차산이 가장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산의 경사도 완만하고, 산의 지면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는데 땅, 흙의 느낌이 전반적으로 푹신푹신한 게 기분 좋았다. 산의 몸통? 산의 가죽? 산의 가죽이 괜찮은 것 같다. 산의 가죽 느낌이 좋았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한강이 보이는 풍경도 좋았고, 제주도 오름 같은 느낌이 나는 것도 좋았다. 비가 안 와서 지금 계절의 푸른 풀꽃과 밝은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빛깔"이 좋았다. 등산을 안 좋아하는 청년도 이 풍경을 보여주면서 설득하면 다음 자조모임은 아차산으로 소풍을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하산을 시작했다.
아차산 정상 표석 내용 : "아차산은 주변의 용마봉, 망우현을 함께 부르는 표현이었지만..."
어쩐지 붙어있더라. 원래는 그냥 아차산이었는데 용마산이 독립했나 보네.
해충기피제는 내려와서 발견했는데 새삼 우리나라 대단하다 싶었다. 그래도 올라갈 때 봤으면 더 좋았을 거 같다. 내려와서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처음 거니는 새로운 동네의 사진도 남겨봤다. 누군가들도 이곳에서 나와 똑같이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으로 살아가고 있겠지.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와 서브웨이에서 스테이크앤치즈를 썹픽으로 포장 주문해 봤다. 방에서 커피랑 같이 먹으면서 드는 생각이 '와, 그렇게 다녔는데도 아직도 점심 때라고?'
늦잠을 잘 못 자는 예민성이 이럴 때는 또 유용하다 싶다.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구나.
다음 주 일요일에는 날씨가 허락한다면 수락산-도봉산을 쳐낼 계획이다. 비가 안 와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