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를 만든 다섯 살의 기억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 이야기

by 여름 이후

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기억력이 좋다. 오래전 내게 벌어진 일들도 꽤나 선명하고 분명하게 기억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걸 뽐내지는 않는다. 남들을 잊은 어떠한 사건을 기억하는 건, 상대에게 불쾌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피곤한 일이기도 때문이다.


내가 유난히 오래 붙잡고 있는 기억은, 아마도 내가 5살쯤 무렵일 것이다. 그때의 나는 잠시 바닷가 앞 빌라에 살았다. 제주도로 발령이 난 부모님 덕분이었다. 쉬는 날이면 서울에서 가족들과 지인들이 놀러 왔고, 매일같이 바다며 관광지며 제주도 곳곳을 누비며 살았다. 늘 맑던 하늘과 푸른 하늘, 어쩌면 미화된 순간일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은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그때 나는 2살 터울의 동생과 한 방을 썼는데, 아빠가 야근을 하는 날이면 엄마와 안방에서 함께 잤다. 안방에 이불을 넓게 펴놓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셋이 함께 잠이 들던 날들이었다. 문득 새벽에 깬 날도 있었다. 그때 엄마는 안방에 있던 작은 TV에 콘솔형 게임기를 연결해 테트리스를 하고 있었다. 따분하고, 외로워 보이던 엄마의 눈, 포근한 이불의 감촉이 여전히 선명하다.


한 달에 한 번쯤, 어쩌면 세 달에 한 번쯤 홀로 서울에 가기도 했다. 첫 손주, 조카를 그리워하는 양가 가족들에게 제 몫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제주공항까지 부모님이 바래다주시면, 승무원 손을 잡고 들어가 잠시 기다리다 비행기에 탔다. 내 목에는 나를 의미하는 여러 표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비행 중 답답해 그것을 빼려고 하면 승무원이 부드럽게 제지했다. 김포공항에 내리면 고모부 또는 할아버지, 어떤 날은 아빠의 사촌 동생이 마중을 나왔다. 그러면 나는 3-4일쯤은 친가에서, 또 3-4일쯤은 외가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 다시 제주로 갔다. 외갓집 바닥에 앉아 장난감 차를 슝슝 밀며, 나를 외가에서 데려가기 위해 온 고모부가 외할아버지의 오랜 연설을 듣고 있는 모습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기억 중 하나이다.


제주도 공원에서 하는 폭죽놀이를 보다가 세일러문 마지막 회를 놓쳐 속상했던 날, 떡을 잔뜩 사서 놀러 온 이모와 풀밭에서 놀다가 벌집을 건드려 도망가던 순간, 1층집 언니와 갑자기 친해져 하루 종일 인형놀이를 하던 일까지. 사소한 순간들이 단편적으로나마 드문드문 떠오른다.


가장 선명한 기억은, 내가 책을 읽던 순간이다. 나가서 뛰어놀기보다는 책 읽기를 좋아하던 나는 엄마 앞에서 소리 내어 책 읽는 것을 뽐내고는 했다. 그때 읽었던 책은 한 농부의 이야기였는데, 무를 '뽑'는다는 내용이 나왔다. 나는 무를 '뽑'았어요!라고 크게 말했다. 엄마는 눈이 동그래져 내게 '뽑'이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는지 몇 번을 되물었다. 내가 어려운 글자를 읽었다는 사실이 즐거워 보이는 엄마의 얼굴에 나는 기쁜 마음을 숨기고 별거 아니라는 듯 응 그럼, 하고 답했다. 엄마는 나를 꼭 안고 우리 아기 똑똑해,라고 말했다.


그 짧은 칭찬은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그 순간 나는 5살 인생 처음으로 무한한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내가 특별함을 품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제는 자신감이 바래진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자신감이 떨어지는 순간, 글이 잘 풀리지 않는 날이면 그 시절이 떠올리는 것은. 큰 소리로 책을 읽던 나, 엄마의 반짝이던 눈. 그 오래된 기억이 여전히 나를 움직인다.


오래전 제주도의 바람, 새벽의 작은 불빛, 책장을 넘기던 어린 나의 손끝. 그 모든 장면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 기억 위에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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