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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ru May 31. 2024

[멋진 신세계]

# 책 발제 7. Brave New World

멋진 신세계 _ 올더스 헉슬리 作

이덕형 옮김

 

‘20세기 기계문명의 발달과 과학의 진보가 전체주의 사상과 밀착될 때 어떤 인간적인 비극이 초래될 수 있는가를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기술의 과도한 발전이 가져올 위험을 경고한 반유토피아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 옮긴이의 평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고도의 과학 문명 발달이 왜곡된 전체주의자와 만났을 때의 인류의 실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후반부부터는 그들의 세계와는 정반대의 <야만인의 구역> 사람을 만남으로써 서로 간의 극단적인 사상적 갈등과 대립을 보여준다.   

   

이들의 유토피아를 만든 포드와 총통들은  물질적 정신적인 그들의 창조주이다.


이 세계가 소, 돼지 가축을 기르는 방식과 무엇이 다른가?

가축우리 속 인간들은 철저히 등급화된 시스템 속에서 질서와 규칙에 순응하며 순환되는 곳에 살고 있다. 자연의 섭리, 자연적인 순환 따위는 배제되어 있다.

자의적인 사고와 창조적인 발상은 위험한 것이다.


창조주 포드와, 총통인 무스타파는 과연 그들의 선택권을 박탈할 자격이 있는 자들일까?     

     

”만인(萬人)은 만인의 공유물이야. “
“안정이라는 것,” 총통이 주장했다.
“안정, 사회 안정이 없이는 문명은 있을 수 없다. 개인적인 안정이 없이는 사회의 안정도 없다..... <중략> 기계는 회전하고 회전한다. 기계는 영원히 회전을 계속해야 한다. 회전을 정지하면 그것은 죽음이다.     
“제군들은 행복한 거야.”
“제군들의 생활을 감정적으로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여하한 수고도 아낀 적이 없었다.  
 될 수 있는 한 어떤 감정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목표로 하는 것은 ‘안정’이다. 이 ‘안정’은 사회적 시스템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핵심이다. 예전의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속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안정’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때문에 수면교육과 소마를 이용해 인류를 가축우리 속에 가뒀다.


포드기원 141년에 9년간 전쟁이 있었다. 전쟁 이후의 선택이 지금의 세계이다. 그들은 세계통제와 파멸의 선택지에서 안정을 위한 세계통제를 선택했다지만 과연, 이것이 인간존엄성이 파멸로 가는 선택은 아니었을까?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이 세계에 속한 인류지만 ‘안정’ 속에서 ‘감정’을 알아차리게 되는 말하자면 이 세계의 돌연변이들이다. 야만인의 구역에서 만난 존과의 교류를 통해서 난생처음 ‘자의식’에 눈뜨며 혼란스러워하고, 총통 무스타프는 자신들이 선택한 세계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야만인 존에게 설득하려 한다.

     

인간은 자의식이 있는 동물이다. 때문에 인간에게 완벽한 통제는 있을 수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의문을 갖는 것,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힘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의 경계는 무엇일까?

책에서는 두 세계가 너무나 극단적이다. 그들만의 경계가 분명 존재하지만 쉽게 납득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도 시작은 민주주의를 표방하였으나, 전체주의를 바탕으로 초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할 수 있다. 성장과 함께 얻게 된 욕망과 과욕이 지금의 개인주의형 인류를 생산해 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다움의 경계가 아닐까?

"오 멋진 신세계여!!  "  

야만인 존 이 한탄스레 뱉은 한 마디가 가슴을 탁! 친다.


책의 시작에서 <니콜라이 베르자이예프>는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유토피아가 될 것인가? 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본인 존재가치의 우월성에 한껏 취해있는 특권만을 위한 유토피아는 아닌지 말이다.

그의 말처럼 인간의 삶은 유토피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개개인의 방향성인 것이지 인류 전체에 바탕을 두고 그것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다시 한번은 고통의 시대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해무처럼 드리운다.

개인주의를 넘어 초개인주의자들의 무지함과 불안함이 또 다른 전체주의로의 의지로 전개될까 겁이 난다.

부디 기우(杞憂) 이기를 간절히 바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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