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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ru Apr 19. 2024

가족의 기억_  할머니 장례식

#인간발제 1. Madam 하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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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한; 방금 할머니가 운명하셨습니다.

          장례식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

          .

..........

아이들 겨울방학이던 12월 27일 오전 10시.

4학년 큰 딸과 스타벅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에 동생에게 문자를 받았다.


남들의 시선 따위 상관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쩌면 할머니의 죽음을 기다렸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익숙하고 익숙하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건만 가슴이 미어지며 쏟아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승은아 , 왕할머니 돌아가셨데. 집에 가자."


머릿속이 하얗다가 맑아진다.

언제 눈물이 났냐는 듯 돌아온 이성은 체계적인 사고로 상황을 정리한다.


첫째. 당장 승은이 치과치료받을 것.

며칠 전 앞니 신경치료를 받고 지속적인 방문치료가 꼭 필요였던 터라 나에겐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할머니는 할머니. 내 새끼는 내 새끼. 어쩔 수 없다.


둘째, 친구들과 수업 간 둘째 아들 스케줄 확인과 막내 유치원 하원시간 체크.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앞의 상황과 이후 계획을 시간별로 정리해서 알려줬다.


치과 가는 택시 안에서 아버지께 전화를 드린다.

이제야 맑았던 정신이 다시 아득해진다.

"아버지..... 우째요.. 흪흪흪... 괜찮으세요?"  

"끄...흑흐흪..  괜찮다! 천천히 내려온나."

아버지는 쏟아지는 슬픔을 억지로 삼킨다.


할아버지는 5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도 나는 전화기를 들고 똑같이 물음으로 읍소 했다.

"아버지.. 흐윽윽..  우째요..  흪흪.. 괜찮으세요?"

"허흡  ..끅  우짜노 .!!. 우짜꼬.!!. 아이고!!.."

부모를 보내는 첫 경험은 그를 무장해제 시켰었다.

나이,사회적 지위,체면 따위의 가치는 무의미했다.


한 번의 경험을 통해 학습된 상황을 써보려 하지만 지금의 아버지는 감성과 이성의 중간쯤 어디서 갈피를 못 잡고 계신 듯하다.


70세를 바라보는 아버지는 이제 고아가 되었다.

5년 전 92세로 아버지를 여의었고, 오늘 96세의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자식들에게 부모의 죽음은 먹먹함 그 자체일 뿐,

호상은 타인의 입에서나 오르내릴 수 있는 단어다.


일주일 전 의령집에서 창원 요양병원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오면서 가족 모두 마음의 준비를 했다.

식구들이 24시간 돌아가며 정성을 다했지만, 군데군데 욕창의 잔흔이 생긴 터였다. 

음식도 물도 못 삼키시혈관이 계속 터지는 바람에 주삿바늘조차 꽂기 어려웠다. 요양병원에서는  할머니에게 더 고통이 될 수도 있으니 그만하고 편하게 가실 수 있게 해 드리자고 했다.

그런 할머니 곁에 아버지가 24시간 계셨다.

본인의 간곡한 의지셨다.

할머니는 기력이 없어 눈도 제대로 못 뜨셨지만, 한번 잡은 8남매 장손의  손은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꼭 잡고 놓아주질 않으셨다.  

외아들이었던  할아버지에게서 낳은 8 남매 자식들. 그중에 장손인 아버지의 존재감은 이로 말할 수 없는 위상이었다. 살아생전 할머니 할아버지의 든든한 기둥이었으리라.  아버지 또한 기대에 부응하는 착하고 자랑스러운 효자가 되고자 늘 애쓰셨다.


그런 할머니를 보며 아버지는 본인이 공진단을 너무 많이 드시게 해서 이리 편히 못 가신다며 자신의 욕심이 불효를 저질렀음에 내내 마음 아파하셨다.


장례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70대, 60대 가된 할머니의 자식들은 사회에선 다들 베테랑들이다. 흙수저로 태어나 모두들 참 열심히 바르게 살아온 결과로 자식들에게는 동수저쯤은 물려줄만한 바탕을 일구셨다.

그런 자식들이니 어머니 마지막 보내드리는 절차를 소홀히 할 리  없다.


사흘 장례기간 동안  빈소객은 점심 저녁으로 끝이 없이 이어졌고, 장례식장에서는 음식주문량이 역대급을 기록했다.

가족만 남은 늦은 저녁에는  막내삼촌이 추는 춤사위를 즐겼다. 나와 띠동갑인 막내삼촌은 자신은 우리 엄마가 좋은 데 가서 너무 잘 지낼 거 같다며 d와 b로 조합된 완벽한 몸매를 뽐내며 할머니 영정사진 앞에서 끼를 발산했다.

막내삼촌의 형, 누나들은

 "미친놈.. 저.. 미친놈."  하면서도  올라간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사촌 몇몇은 큰며느리인 엄마의 지령으로 문을 꼭 닫고, 객이 오는지 살펴야 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행여 부족함이 있었어도 어지간해서는  좋게 좋게 받아들이는 할머니의  긍정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온전한 자신의 형태로 땅에 묻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할머니는 고운 그 자태 그대로 관에 옮겨졌고 상여꾼들과 40여 명 자손들의  시끌벅적한 배웅을 받았다.

그렇게 70년  한 여생을 함께 해 온  그녀의 단짝  옆에 나란히 뉘이셨다.






Prologue_


"섭아!  흡.,섭아!  너거 엄마  죽었따!. 흐.으으으으으으  으으으으읗"

아버지는 할머니 임종 직후에  창원 둘째 삼촌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  ..형님 .. 바로 가께요...   ....."


'우리 엄마'가 아닌 '너거 엄마'.

[우리]라는 표현조차 어색한 찐 경상도 형제에, 띠동갑 한참 아래 동생이지만,

그래도 그 동생 앞에서는 맘놓고 목놓아  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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