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한 천년 전통의 일본 온천마을 츠에다테의 추억
3년 전 일본 큐슈올레로 트레킹을 갔다가 깊은 산속 온천마을에서 하루를 묵었다.
구마모토현 뱃부와 오이타현 경계에 있는 '츠에다테'다.
뱃부에서도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한참을 달려가야 할 만큼 오지의 온천마을은 맑고 깨끗한 공기에 알카리성 온천수로 유명하다.
하지만 료칸이라고 불리는 전통가옥은 보이지 않고 낡고 허름한 현대식 건물이 즐비했다.
무엇보다 난리 통에 모두 들 피난을 떠난 뒤 버려진 마을처럼 주민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 유서 깊은 온천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츠에다테가 있는 뱃부는 일본의 대표적인 온천관광지다.
자동차로 뱃부 일대의 소도시와 마을을 지나다 보면 한결같이 땅속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온천수도 끊임없이 솟아난다.
'휴화산'인 아소산을 끼고 있다 보니 온천은 아마 천혜의 관광자원일터다.
물론 용암이 언제 분출할지 모르는(실제로 두 달 전 아소산이 분화해 고온 분출물이 1km 이상 날라갔다)휴화산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이 마음이 편한 일은 아니겠지만..
뱃부에서도 츠에다테는 전통 있는 온천마을이다.
1800년 전 츄아이 천왕의 아기를 임신한 신구 황후가 출산을 위해 이곳을 방문해 갓난아이를 목욕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 온천은 약 100도의 고온으로 약 식염성 약 알카리성의 무색투명한 온천이다.
신경통이나 피부질환에 좋고 '메타규산'을 함유해 피부미용에도 뛰어난 효과가 있어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수안보와 부곡온천처럼 동경을 비롯한 대도시 신혼부부의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았다.
마을엔 옛 영화(榮華)의 흔적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천 변 주변에 번듯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츠에다테에 밤에 도착해서 자그마한 시골 마을로 생각했다가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고 살짝 놀랐다.
전날 저녁 어둠이 짙게 깔린 산속의 도로를 구불구불 달리는 차 안에선 이곳이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않은 오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도 인제 아침가리나 충북 단양 어상천면, 지리산 청학동처럼 깊숙한 두메산골을 연상했다.
하지만 츠에다테는 칙칙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번성했던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는 소도시였다.
'히젠야'라는 이름의 호텔에 도착해 일본식 정식인 가이세끼 요리로 저녁 식사를 한 뒤 찾은 곳이 노천온천이다.
일본 유학생 출신 가이드가 이곳에 오면 반드시 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래서 나도 일본 전통 복장인 유카다를 걸치고 셔틀버스를 타고 노천온천으로 향했다.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노천온천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편백 나무로 지어진 노천온천 건물은 장인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듯했다.
독특한 조명 때문에 내려가는 계단은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였다.
아마 츠에다테가 전성시대에 지어진 건물일 것이다.
카운터부터 정갈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의자도 프레임은 나무로 만들었지만 앉는 자리는 다다미로 짜 넣었다.
계단 복도에 놓인 골동품 괘종시계는 이 노천탕이 신산(辛酸)한 세월을 알려주었다.
시계는 한창때는 속옷에 유카다만 걸친 수많은 고객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지켜보았을 터다. 그때는 주로 '혼슈'의 대도시에서 찾아온 일본 관광객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제법 규모가 큰 노천탕엔 1인용 히노끼탕을 비롯해 다양한 탕이 산재해 있었다.
노천탕을 즐기는데 가장 좋은 계절은 겨울이다.
하얀 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에 하늘이 뻥 뚫린 히노끼탕에 들어가 있으면 천국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런 좋은 시설에도 이날 노천탕을 찾은 사람들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일본은 이제 인구도 줄었고 젊은이들은 결혼을 꺼리고 있다.
그래서 이런 오지의 온천마을에 찾아오는 여행객의 발길도 점점 뜸해지고 있다.
최근 일본에는 '연예하지 않는 젊은이들'이라는 책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데 이런 젊은이들을 일본에선'초식남' 또는 '사토리 세대'라고 부른다.
희망도, 의욕도 사라진 채 무기력해진 청년들에게 결혼하고 애를 낳고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옛날이야기가 됐다. 그나마 소비수준이 높은 40대와 50대 중산층은 해외여행을 즐긴다.
그래서 온천지대에 위치한 료칸은 20여 년부터 두 가지 길을 선택하고 있다.
미니시리즈 '아이리스2'에서 이병헌과 김소연이 눈 덮인 대나무숲이 보이는 다다미방에서 사랑을 속삭였던 료칸처럼 일본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거나 아니면 단체숙박객을 받기 위해 호텔식 고층 건물로 신축한 개량된 료칸이다.
츠에다테와 '히젠야'는 두 번째에 해당한다. 하지만 한때 해외관광객이 물밀듯이 밀려올 땐 재미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갔을 때가 코로나19 직전이니 그 이후엔 더 적막한 온천마을이 됐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한때 번성했던 전통적인 온천들이 이젠 쇠락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온양온천과 수안보온천이다.
온천수는 여전히 피부에 좋은 성분을 함유하고 있지만 향토색 짙은 '온천문화'라고 할만한 콘덴츠가 없다 보니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가끔 일본여행을 하면서 료칸에도 수차례 묵었는데 '히젠야'처럼 호텔식 건물로 지어진 료칸은 처음이다. 내가 묵은 방은 침실과 거실이 있는 이른바 스위트룸이었다.
거실을 중심으로 방 한 칸은 침대가 있고 다른 방에는 이불을 깔아놓은 다다미방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마케팅전략인 듯한데 내 생각에는 이렇게 '얼치기'로 해놓으면 정체성이 사라질 뿐이다. 외국인이 원하는 것은 불편하건 편하건 료칸에서 일본식 잠자리를 원할테니까. 장기적으로 전통을 지키는 것이 온천을 지키는 힘이 아닐까.
하지만 츠에다테는 빼어난 자연환경과 2천 년에 육박하는 유서 깊은 온천임에도 불구하고 쇠락해 가는 중이다. 사람이 오지 않는 온천은 왠지 적막감이 더한다.
관광지는 사람이 붐벼야 분위기가 살아난다. 이른 아침은 인적이 별로 없는 때이긴 하지만 산책 삼아 나온 온천마을에는 주민들을 보기도 힘들었다.
마을 중간중간 수중기가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보면 여전히 온천수는 풍부했다.
하천 변 주차장에는 제법 자동차도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상가 근처에 접근해 자세히 들어다 보면 사람이 없다.
문을 닫은 상가도 많고 무엇보다 젊은이들을 보기가 힘들었다.
일본 인구가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온천관광이 주 수입원인 츠에다테에도 관광객이 줄면서 주민들이 도시로 떠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옛날에는 관광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을 것이다. 아름다운 산세가 품에 안은 온천마을의 쇠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이렇게 훌륭한 천혜의 자연환경도 잘못된 콘셉트로 온천마을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경쟁력을 잃는 것은 비단 일본뿐만은 아니다.
가족 단위 관광객들은 단순히 온천뿐만 아니라 즐길 거리를 찾는다. '스파'라는 이름이 붙은 다양한 온천시설과 워터슬라이드, 워터파크가 없는 온천은 젊은 층은 좋아하지 않는다. 온천마을의 중심 하천을 연결하는 지붕이 있는 다리엔 사랑의 징표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아마 아주 오래전 이곳을 찾은 신혼부부나 연인들이 다양한 나무 조각에 사랑의 언약을 써서 걸어놓은 듯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걸어놓은 이 징표들을 잊었을 것이다.
츠에다테는 과거의 영화가 잔상(殘像)처럼 흐르는 이제는 한물간 온천관광지다.
계곡으로 이어지는 하천은 여전히 아름답고 깨끗하다. 안개를 뚫고 붉거나 노란 잎새를 뽑내는 단풍나무도 눈길을 끈다. 그 옛날 개발하지 않고 전통 온천마을로 남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천 년 이상의 역사가 있고 아무리 멋진 풍광과 고품질 온천이 분출된다고 해도 시대 현상과 트랜드를 거스른 온천마을이 어떻게 쇠락해 가는지 츠에다테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