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가 금빛으로 물들면 코끼리 바위는 광채를 뿜어낸다.
충남 서산 황금산 해변 바윗길 트레킹
구름 빛도 가라앉고 섬들도 그림 진다.
끓던 물도 검푸르게 잔잔히 숨더니만
어디서 살진 반달이 함(艦)을 따라 웃는고
<시인 이태극의 詩 '서해상의 낙조'중에서>.
충남 서산 대산읍 독곶리 황금산 바윗길 트래킹의 날머리는 아주 작은 포구였다.
포구에 있는 허름한 식당은 세발낙지 요리로 유명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주방에 있던 건조한 인상의 50대 주인장은 손님을 쳐다보지도 않고 낙지가 다 떨어졌다고 소리쳤다. 다소 허탈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니 바다 저편 노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태극의 詩처럼 살진 반달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나무로 만든 한 쌍의 솟대가 노을을 배웅하고 있었다. 선착장에는 조각배들이 한가롭게 쉬고 있었다. 포구의 초겨울 풍경은 평화로웠다. 아주 짧게 붉은빛을 토해내고 있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시장기’는 잠시 사라졌다.
노을이 사라지니 먼바다에서 초승달이 날 보고 미소 지었다. 그저 마음이 편했다. 3시간여 동안 손에 땀을 쥐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느꼈던 바위길 트레킹을 무탈하게 마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처음엔 단순히 황금산에 오르기 위해 왔다. 그러나 해발 156m의 나지막한 산은 초입부터 실망감을 주었다. 적어도 명산은 아닌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등산로 입구의 산만한 풍경을 보니 잘못 왔나 싶었다. 조개구이를 파는 가설 천막이 좁은 길목을 장악했다. 길도 엉망이고 주차 공간도 좁았다.
관광버스가 여러 대 보이는 것을 보면 멀리서도 행락객들이 많이 오는 듯했다. 속으로 서산시의 관광 행정을 흉보며 후배와 함께 해변으로 내려갔다. 등산로 대신 황금산을 끼고도는 바닷가를 택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런 바닷길은 처음이었다. 모래사장이 없었다. 그렇다고 갯벌도 아니었다. 긴 해변엔 삐쭉 빼쭉한 돌무더기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무척 흥미로운 길이다.
그런데 이 해변을 품고 있는 산은 왜 ‘황금산’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게 됐을까. 무릇 전설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 다양한 ‘썰’이 있다. 금이 발견됐다는 말도 있고 이 일대가 노을이 지면 온통 금빛 찬란한 장관 때문이라고도 하고 주변 해역이 해산물이 풍부한 황금어장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바닷길에 접어들면 일단 풍광에 압도당한다. 억겁(億劫)의 세월이 빚은 주상절리의 절벽이 해안을 수놓았고 해변은 온통 바위 투성이다. 아마도 주상절리 암벽의 파편이 거친 해풍을 이기지 못해 바닷가에 깔렸을 터다. 그래서 이 길은 한 발 한발 신중히 내딛지 않으면 바위 틈새로 발이 빠지게 된다.
그런데 그 해변엔 촛대를 연상시키는 기암괴석이 야트막한 산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해변 중간중간엔 이런 바위산으로 막혀있어 이 길을 걸으려면 졸지에 암벽 타기를 하던가 바위에 걸쳐 있는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 눈 내리는 한겨울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앞서 걷던 모 산악회 여성회원들은 밧줄을 잡으며 당혹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길로 이끈 카페지기를 원망하는 소리도 들렸다. 내리막길에선 누군가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자칫 넘어질 수도 있다,
이런 바위산이 서너 개는 넘어야 한다. 이 해변을 지나며 다치지 않으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다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도 춥기는 커녕 외려 진땀이 흐른다.
이런 바윗길이 무려 2∼3㎞ 이상 이어졌다.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웬만한 트래킹 코스 세 배 이상 체력과 시간을 소비했다. 그만큼 바윗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극기훈련장에 따라온 철없는 소년처럼 짜릿한 스릴을 느꼈다.
이 길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코끼리바위다. 영락없는 코끼리 모양을 한 높이 5m의 거대한 바위가 긴 코를 바다에 내리고 바닷물을 마시는 형상에 입이 딱 벌어졌다. 코끼리가 봐도 친근감을 느낄 정도로 닮았다.
썰물 때는 구멍이 뚫린 아치형 코끼리 바위 아래로 길이 이어진다. 그래서 인증사진을 남기려는 탐방객들로 늘 정체현상을 빚는 곳이기도 하다.
우린 코끼리바위 목 부위를 타고 넘어 해식동굴이 있는 굴금으로 향했다. 굴금 주변은 걷는 내내 괴롭혔던 뾰족한 바위 돌이 아니라 부드럽게 다져진 몽돌이 깔려있어 마치 다른 해변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멀리서 바라본 코끼리 바위엔 황금색 광채가 휘감고 있었다. 역시 오후에 오길 잘했다. 마음이 저릿할 만큼 황홀한 풍경이다.
우린 황금산 숲길을 빠른 걸음으로 올랐다. 산은 우리 동네 뒷산만큼이나 평이하다. 다만 임경업 장군을 모신 황금산사(黃金山祠)에서 바라본 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처럼 생긴 가로림만(加露林灣) 전망은 석양 때문인지 서정적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그곳에서 잠시 ‘뷰’를 감상한 뒤 저녁 식사를 위해 포구로 향했다.
세발낙지는 구경도 못하고 식당을 나와 걷다가 붉은빛이 감도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놓고 그 속으로 묻어가는 듯했다. 괜스레 가슴이 뭉클했다. 한 해가 저무는 동지섣달이기 때문일까. 그날 황금산 낙조는 유난히 찬란했다. 이제야 황금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