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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an 26. 2024

다카포 da capo

연주에서 ‘처음부터’라는 뜻




나에게는 습관 하나가 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어떤 일을 다시 진행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일단 모든 걸 처음 상태로 되돌려 가장 초기의 상태 이른바 ‘무’의 상태로 만들어 놓는 습관이다.

마무리까지 한 작업이 있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생기면 어김없이 새 창을 띄어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이 습관은 그림을 그리던 학창 시절부터 있었던 버릇이었다. 데생을 하다 보면 기술 없이 올린 흑연이 뭉쳐 더 이상 필선이 올라가지 않는 지경에 이를 때가 있다. 이런 때가 되면 뭉친 부분의 종이는 반질거리고, 깊었던 음영이 종잇장처럼 얇아진다. 볼품 없어진 (내 기준으로 망친) 그 부분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 전체가 망가진 기분이 들어 어김없이 새 종이를 가져와 처음부터 다시 그리곤 했다.

이때부터의 버릇인지, 모든 초기화된 상태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게 마음 편했다.
오랜 추억을 쌓아가던 SNS도, 심심풀이로 썼던 소설도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깝다), 심지어는 파티원들과 고생하며 만들었던 만렙 게임 아이디까지도.


그러다 문득, 작은 생각의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망가진 나무를 살피다 주변 아름답게 성장한 다른 나무들을 보지 못한 것 아닐까 하는.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망가졌다 생각한 나무가 사실은 더 아름다운 녀석은 아니었을까 하는.

변화된 마음가짐은 오히려 더 많은 선택지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실패했다 생각했던 것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보니 다시 보이는 소중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혹시나 수정이 안된 부분이 생기지는 않을지 더더욱 꼼꼼하고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남아 있는 데이터들로 인해 생각의 폭은 넓어지고 풍성해졌으면 문제 해결에 대한 다양한 선택지를 고려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쩌면 이제껏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을 선택했던 건지 모른다. 아직도 나는 무언가 다시 시작할 일이 생기면 처음으로 돌아가고픈 욕구를 진정시켜야 한다.


이제는 뭉친 흑연들을 조심히 털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선을 쌓아 나가봐야지. 놓치는 것들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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