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카우보이도 금융전문가로 만드는가
과거 시대극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현대적인 카우보이들이 등장한다. 미국의 개척시대에 나타나는 무법과 황량함에 관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액션 가득한 서부극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잔잔함 마저 느껴진다. 영화 중반까지도 이 영화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인내하면서 보았다. 한국의 욕쟁이 할머니를 닮은 미국 시골의 한 식당에 있는 할머니 웨이트리스가 이미 정해진 메뉴를 읊으며 다른거 주문하는 자에게는 쌍욕이 날아갈 수 있음을 경고하며 쿨내 진동하는 미국 남부 억양과 세상 다 살아본 눈빛으로 산전수전 겪어봤을 텍사스 레인저 둘을 상대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웃긴 장면이다.
또 다시 고민하며 영화를 보면, 결국 말하고 싶은 부분은 후반부에 몰려있다. 여러 주제가 있겠으나 어딘가 모르게 확실하지 않고 번잡난해한 영화다. 거꾸로 말하면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충분히 볼만한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할 거리를 확실하게 던지고 싶은 부분은 주인공들의 대화에서 나오는 미국을 위시한 현대 자본주의의 뿌리깊은 모순에 대한 현재와 미래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텍사스의 황량한 도심이다. 한 벽면에는 '이라크를 세 번이나 갔다왔는데 정부는 우리 같은 사람을 구제할 생각이 없네'라는 낙서가 쓰여있고, 보여주는 거리마다 곳곳에는 폐업, 채무구제, 대출광고가 가득하다. 카우보이 모자를 쓴 두 텍사스 레인저는 변두리의 작은 은행들을 터는 2인조 강도를 찾고 있다. 이 두 강도는 특이하게도 지방의 작은 은행만 털면서 10달러, 20달러 따위의 소액 지폐만 훔쳐간다. 이후에는 강도에서 쓴 차를 땅에 묻고, 다른 차를 써서 또 이런 방식으로 은행을 턴다. 모은 돈은 카지노에 가서 칩으로 바꾸고 또 다시 현금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현금의 흐름을 추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둘은 형제로 형은 어릴 때부터 범죄를 일삼아 감옥살이를 했고, 동생은 나름 인생을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한 것 같지만 노동만으로, 노력만으로는 오히려 집안의 빚만 쌓여간다.
(나머지는 직접 스포일러라 자제하고 다음은 영화를 보면 느낀 문제의식을 지적하려 한다.)
카우보이와 미국적 가치
이 영화는 분명히 서민들에게 가혹하게 다가온 자본주의의 현실을 나타내고 있다. 텍사스는 미국의 개척의 역사이자 현재를 상징한다. 처음부터 이 곳이 미국의 땅은 아니었다.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얻은 이 땅은 유럽에서 대성양을 건너고, 또 미 동부에 도착한 사람들 혹은 그 후손들이 또 다시 서쪽으로 개척하는 과정에서 인구가 모여들고 정착지가 만들어진 곳이다.
미국의 개척시대의 이런 확장은 국가가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프론티어, 개척정신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역사에서 만들어진 미국적 아이덴티티는 개인, 자유, 책임이라는 키워드를 가진다. 대서양을 건너온 그 때부터 미국의 탄생과 서부개척의 모든 과정은 온전히 개인에게 맡겨졌다. 정부나 경찰, 군대가 개인의 삶을 책임지는 형태가 아니었다. 수많은 개척자들이 실패를 겪고, 그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땅을 개척한 사람들에게만 기회가 생겼다. 거대한 땅을 일구고 농장을 만들어 경영하는 것도 국가가 보호해주지 못했다. 마을과 공동체의 질서는 개인이 스스로 총을 쥐고 무장해서 스스로를 지켜야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래서 텍사스, 카우보이의 모습을 가득 보여주는 이 영화의 배경은 국가의 개입이나 간섭 없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스로를 지키고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프론티어 정신, 철저히 개인의 판단과 선택으로 성취하는 개척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것이 주인공을 통해 지금도 유효한 미국적 가치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이론적으로는 미국사회의 총기소유 문제는 이러한 자유와 생명존중의 가치가 충돌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형제가 가난으로 해방구가 보이지 않을 때, 왜 은행을 터는가에 대한 질문을 반드시 해야한다. 결코 그 선택이 즉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왠지 두형제가 은행을 터는 행동이 심각한 범죄나 악행으로 묘사되지 않는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심지어 그 강도를 보았던 식당의 웨이트리스는 본적이 없다고 감싸기까지 한다. 동생(크리스 파인)의 잘생긴 얼굴이 한 몫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이상으로 목숨을 거는 자유에 대한 동경과 존중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법과 제도는 결코 느슨하지 않다. 수백년간 이어져 축적된 경험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은 기본적으로 이런 국가와 제도에 저항하는 DNA가 있다. 유럽의 국가 시스템에서 탈출한 것이 그들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라도 개인의 삶에서 자유를 침해한다면, 설령 그것이 국가가 정한 법을 위반하는 범죄라 할지라도 자유라는 신념을 선택한 책임과 위험을 모두 감수할 수만 있다면 그 선택은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제가 은행을 털고 텍사스 레인저가 그 둘을 추적하는 모습이 스릴넘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실상 이것은 범죄에 초점을 둔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제도적 진화
놀랍게도 두 형제의 은행강도는 절대 자본주의나 질서 파괴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너무나 힘주어서 표현한다. 그 중에서도 동생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너무나 잘 이용하고 있다. 보통의 은행강도라면 돈을 훔쳐 흥청망청 쓸 것 같지만, 은행강도로 취한 돈을 세탁해서 동생이 간 곳은 또 다시 은행이다. 세탁한 돈으로 가족의 대출을 모두 청산하고, 신탁계좌를 만들어서 텍사스에 있는 땅과 거기서 나오는 석유의 수익이 전부 자신의 자식들에게 가도록 설정한다. 미국 법에서는 이렇게 만든 신탁계좌는 설정된 대상 외에 직계가족 그 누구라도 건드릴 수 없다. 핵심은 미국의 자본주의가 오늘날까지 발전시킨 독특한 소유권 제도이다. 물건을 생산하고 팔아서 재산을 얻는 방식을 넘어서, 생산체계, 영업권, 특허, 땅의 법적 소유에 대한 무형재산의 법적 보호와 권한이라는 독특한 제도,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진화임을 20세기 초 경제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그저 은행을 털어 일시적으로 인생을 불태울 현금, 즉 유형재산을 얻으려한 것이 아니다. 진짜 동생이 얻고자 했던 것은 무형재산이다. 그 중심은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인 재산의 법적 소유권이다. 끝없이 부가 창출되고 영속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소유권 제도를 아주 철저하게 활용한 것이다. 미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텍사스의 농장과 유전에서 나오는 부는 자식들이 철저하게 보장받게 된 것이다. 은행강도는 단순히 생계가 위협받아 극단적인 선택이 아닌 부를 축적하기 위한 철저히 계획적인 준비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주인공은 기존 자본주의의 법적 제도를 공격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행을 털어 '자본을 창출하고' 그 자본을 축적하고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에 자기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조부모도 부모도 그랬고. 가난은 전염병같아서 대를 이어 전해지면서 사람을 괴롭힌다. 내가 아는 사람을 전부 감염시킨다. 더 이상 내 자식들은 안된다. 농장은 그녀석들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심각한 모순점을 나타내는 지점이다. 부의 대물림은 자신의 조상이 고통을 받았던 이유였다. 주인공은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 후손의 안정을 위해 거꾸로 금융자본주의를 통해 부의 대물림의 장치를 걸어두는 엄청난 모순을 만들어낸다. 노동으로 얻은 성과가 아니라 처음부터 출발선 자체를 다르게 만드는 부의 상속을 금융 제도로 확보한 것이다. 그래서 돈세탁으로 자식들에게 부가 영구히 상속되도록 하는 법적 소유권을 확보한 것은 자신을 포함해서 조상 대대로 고통받은 부의 대물림을 막연히 비난하거나 적대시하지 않고, 상속이라는 불평등을 옹호하고 철저히 이용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너무나도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신념 가득한 개인의 책임있는 선택은 이제 더이상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거나 도전하는 무법자가 아니라, 역으로 자본주의의 제도적 기반에 철저히 종속되어 그것을 활용하는 금융전문가가 되어버렸다.
금융자본주의 세계에서 발견하지 못한 대안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아직 합의되지 않은 시각을 던져준 것이라 생각한다. 한 개인이 은행을 털어 불법으로 세탁, 축적한 자본으로 소유권을 취득해서 부를 상속하는 방식이 잘못됐다 비난한다면, 기업이 자본을 세탁하고(보통 해외로 자금을 돌리거나 세금을 면피하는 방식) 다시 은행을 통해 물건, 땅, 재산 등을 구입하여 법적으로 소유권을 취득, 보호받는 것은 비난의 대상을 면할 수 있는가? 이러한 본질적 문제 때문에 금융자본의 지배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표출된 적이 있던 때가 금융위기였다. 가난한 자에게는 자본주의, 부자에게는 사회주의 (Capitalism for the poor, socialism for the rich)라는 말이 있다. 막대한 금융소득은 소수가 독점하면서, 막대한 금융손실은 전 국민이 떠안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 문제에 답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헷갈리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일반적인 방식은 아닐지라도, 부의 대물림의 문제를 부의 대물림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상속 문제는 사실 부의 대물림을 통해 불평등의 근원이 된다라는 점에서 논쟁이 되어왔다. 노동이 인생 전체를 책임져주는 시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만하면 평생이 보장되는 세계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국가를 통해, 공동체를 통해 복지가 필요했고 사회보장제도가 등장했다. 우리가 국가와 제도를 부정하고 무너뜨릴 것이 아니라면, 거꾸로 우리의 일상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가 시스템과 제도를 관심있게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고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대선에 현명한 선택으로, 공적인 논의에서도 숙고를 통한 제안과 관심으로 조화로운 세상으로 변화시키는데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