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봄은 또 찾아온다
곧 봄날이 머지 않아 그런지 마지막 추위가 기승이다. 개인적으로 몸서리치게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 필자이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곧 지나갈 겨울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된 두 여자이다. 두 주인공의 나이와 배경답게 요즘에는 참 보기 힘든 방식의 소통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 마음만 먹으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즉흥적인 표현이 가능한 시대에 이들의 소통방식은 느리고, 정제되어 생각을 거듭거듭하며 다듬어져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엑기스만 남는 형태의 글, 편지로써 이야기를 풀어간다.
1) 겨울과 봄
이 영화는 계절이 변하지 않는다. 꾸준히 겨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에도 그러하듯 이 영화가 겨울을 선택한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주인공이 젊으면 봄이나 여름이 배경일 경우가 많다. 젊고 파릇파릇하고 순수하고 다듬어지지 않아 일탈할 수 있는 캐릭터가 이제 곧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나, 초여름의 생기 돋아날 것같은 파릇파릇한 잎을 가득 띄운 나무와 생명의 빗소리로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 배경이 생동하는 봄도 생기의 힘이 솟아나는 여름도 가장 화려한 가을도 아닌 겨울인 것은 그런점에서 보면 윤희와 쥰의 삶의 화려한 시절 이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굳이 따지자면 윤희라는 캐릭터 자체도 겨울에 더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인다. 쥰이 윤희에게 쓴 편지에 보면 쥰 자신이 살고 있는 오타루의 작은 도시가 윤희와 잘 어울리는 곳이라 말한다. 사람들 북적이지 않고 불꺼진 밤의 고요하고 고독한 눈 쌓인 겨울밤의 오타루와 같은 윤희. 딸 새봄이 아빠(윤희의 전 남편 인호)에게 왜 이혼했냐고 물을 때 "너희 엄마는 사람을 좀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한다.
집근처 차가운 길바닥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생계를 위해 그다지 배식 일을 하는 핏기 없는 모습에서도 윤희의 삶은 그냥 지나가길 기다리는 듯한 겨울이었다. 그런 윤희가 항상 겨울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짧지만 강렬했던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뜨거운 감정을 느끼고 그 추억으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쥰은 누군가를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이다. 윤희의 겨울을 녹였고, 외로운 가득한 윤희의 삶에 전혀 다른 윤희의 삶을 가능하게 했을 존재였다. 비유적으로 하자면 봄같은 사람이다. 눈쌓인 겨울에 길을 내고, 눈이 언제 끝날 것이냐고 말하며 봄의 다가옴을 알려준다. 윤희의 편지에서 쥰과 있던 때를 "가장 행복하고 충만했던 시절"이라 표현한 것처럼, 쥰은 윤희에게 봄이었고, 그로 인해 자신도 봄을 찾은 사람으로 나타난다.
쥰의 이런 캐릭터는 쥰의 부모에 대한 말에서도 보인다. 쥰은 아빠와 사는 것을 선택한 이유를 "아빠는 나한테 무관심해서, 엄마는 나에게 관심이 많고 나 떄문에 스스로를 비난해서"라고 말한다. 새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부모를 배려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지켜보며 더 깊은 좌절과 절망, 후회의 구렁텅이로 빠질 것 같은 엄마를 뒤로한 것이다.
겨울이 되면 봄이 도래한다. 겨울철 끝도 없이 내리는 눈은 마치 삶의 희노애락 가득한 고됨을 나이듦으로 차분히 묻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눈 아래에 여전히 삶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영화에서 눈을 치우고 길을 내는 모습은 사랑과 열정이 다 사라졌을것만 같은 고독과 외로움의 시간에서도 끊임없이 삶이 지속되는 한 거리를 청소하여 길을 내는 것과 같이 다시 봄을 위해 견디고 있다. 분명히 쥰은 오타루로 상징되는 윤희의 겨울에서 살며 조용히 쌓인 눈을 치우고 봄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둘의 20년만의 재회는 많은 말이 없어도 감동이 되었다. 이후 윤희의 기나긴 어둠의 터널과 같은 겨울은 딸의 이름과 같이 새봄을 기다리는 야트막한 희망의 작은 움직임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움직이는 동기는 바로 "나도 네 꿈을 꿔"라는 평생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봄이었기 때문이다.
2) 담배
이 영화에선 여러 사람들이 담배를 피운다. 비흡연가로서 그 감정을 100%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세월의 회한을 한줄기 연기로 흘려보내는 담배는 그만큼 삶에 대한 상징성을 가진다. 윤희도, 쥰도 담배로 맞닿아있다. 세월 속에 말로는 다 하지 못할 것들을 담배로 대신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엄마로서 윤희는 딸 새봄이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담배 피우지 말라고 라이터를 압수하면서도 딸이 담배달라고 할 때는 건네주는 것이다. 새봄의 가끔 피우는 담배는 이제 성인의 단계에 들어서 엄마와 같이 앞으로 거칠고 험한 세상을 살아갈 한 사람으로서, 또 그 삶의 과정을 통해 세상과 엄마를 이해해나갈 것을 담배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새봄을 이해하기 위해 남친 경수도 새봄을 따라 담배를 따라 피우려 한다. 흡연자 커뮤니티는 말하지 않아도 연결되는 자기들만의 연결고리가 있나보다.
3) 여전히 사회의 영향에서, 스스로에게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랑의 형태
20년만에 윤희와 쥰은 재회한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증오의 감정으로 스스로 끊지 않고 원치않게 강제로 끊겨진 둘의 남겨진 20년의 잠재되어있던 감정이 얼굴과 눈빛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때이다. 그 말못할 복잡 미묘함을 윤희는 오른쪽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로 대신한다 (희애누님 짱...)
분명 윤희와 쥰의 관계는 시대적인, 사회적인 아픔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관계, 그래서 윤희가 정신병원까지 다녀야 했던 시대의 비극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이성, 동성의 이분법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누군가와 사랑의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우리 삶에서 보기 드물기 때문에, 그리고 남녀관계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할 복잡함은 너무나 많은 이유들이 자리하고 있을테니.
개인적으로 어릴 때 윤희에게 조금 더 과감한 용기가, 쥰을 사랑할 용기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윤희는 모진 현실 앞에 '자발적으로' 쥰과 헤어짐을 선택했다. 여전히 세상의 거대한 파도 앞에 좌절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쥰은 헤쳐나갔을 의지가 더 강했을 것 같아서 쥰에게 더 감정이 몰입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쥰의 모습은 오직 윤희의 세계에만 해당한다. 봄과 같은 따뜻한 쥰은 윤희에게만 적용된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에게 쥰은 자신을 평생동안 숨겨왔다고 말한다. 엄마가 한국 사람인걸 평생 숨겨왔다고. 그것 역시 표면적인 이유인 것은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이해할거다. 자신의 정체성은 끝내 숨기고 말하지 않으며, 어떤 남자를 소개받는 것도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며 윤희 외에는 한없이 차가운 쥰이다.
4) 주변인물들
윤희와 쥰의 따뜻한 봄을 추억하게 만드는 매개체는 윤희의 딸 새봄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이혼을 겪어서 그런지 10대의 순수한 모습과 꽤나 성숙한 모습이 겹쳐보인다. 이혼할 때 엄마를 택한 이유가 "아빠보다 더 외로워 보여서"란다. 자신의 선호보다 부모가 아닌 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참 성숙한 딸이다.
새봄의 썸남과 남친의 경계선에 있는 경수를 내내 흐뭇하게 보았다. 운동장에 버려진 구멍난 장갑에 바느질을 해서 새봄에게 한짝, 자신에게 한짝씩 끼고 다니는 모습은 저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순수함 그 자체다. 새봄과 연애행각을 윤희에게 들켜서 새봄 뒤에 숨고, 새봄이 시키는 대로 다 받아주는 모습도 윤희에게 받았을 겨울날의 새봄에게 참으로 봄같은 존재다. (쟤들 저렇게 죽고 못살다가 나중에 헤어질거라 생각한 나는 이미 나이가 너무 든것 같아 좌절했다) 앞서 윤희와 쥰을 겨울과 봄으로 표현하듯, 윤희의 DNA를 그대로 받아 어딘가 까칠하고 어두웠던 새봄의 사진은, 눈쌓인 겨울날 일본에서 경수가 카메라로 담을 때 너무나 이쁜 모습을 하고 있다. 겨울의 모습을 가진 새봄에게는 경수가 봄이었으리라.
은근 불쌍한 존재는 전 남편이다. 의도하지 않았고 이해도 못하게 윤희와 쥰의 삶 전반에 거친 관계의 유탄을 제대로 맞은 모습이랄까. 자신이 택하지도 않았는데 이혼하게 되고, 또 누군가와 재혼하는 것이 그 남자의 삶에서 사랑과 연애, 결혼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싶다. 재혼 청첩장을 윤희에게 내밀며 눈물을 흘려대는 인호가 참 불쌍해 보였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삶의 흐름 속에 나타난 결과였을 뿐인데도.
5) 아쉬움?
개인적으로 지금 시점에서 이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는 아이러니하게도 '김희애'다. 김희애님의 연기나 캐릭터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그동안 예능에서 너무나도 강렬하게 등장한 김영철 개그맨 등을 비롯한 봇물터지던 김희애 패러디 때문이다. 영화에서 전 남편이 넌 늙지를 않는다 할 때 김희애를 보자니 화장품 광고와 김영철 물광피부 패러디가 계속 생각나서 도저히 초반엔 진지하지 못했다 ㅋㅋㅋㅋ
6) 결론
윤희는 편지를 부쳤을까. 용기를 내서 이사하고 새로운 식당에 이력서를 내기 위해 문 앞에서 긴장하고 있는 윤희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답을 주진 않았다. 서로에게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면 윤희답다 할 수도 있겠다. 쥰은 윤희를 존중하며 여전히 다가올 봄처럼 기다려 줄 것 같다. 윤희를 닮은 오타루의 겨울 속에서.
이 글은 팟빵 채널 <상식의 시대>에서 리뷰한 내용을 글로 다듬어 본 것이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