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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 May 21. 2022

필리핀 대선 - 독재자의 아들 '봉봉'에 열광한 이유

문제는 경제다.

5월 9일 17대 필리핀 대선이 치러졌다. 1987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이며, 연임이 불가하다. 이 때문에 두테르테 대통령 시기, 정권 차원의 헌법개정 시도나 두테르테 대통령 자신이 부통령으로 출마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필리핀에서 큰 인기와 영향력을 얻은 두테르테 가문의 권력 연장이 어떻게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주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등장에 압도적 승리까지 가져간 인물은 '봉봉' 마르코스였다. 결과적으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가 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마르코스-두테르테 가문의 동맹이 대선의 승리로 작용했다.


마르코스 봉봉(좌)과 사라 두테르테(우) - 출처: Tribune.net.ph


필리핀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대선이 이슈가 된 이유는 봉봉의 아버지가 바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21년 장기집권 동안 일본에 이어 아시아 2위의 소득수준을 자랑했던 필리핀을 세계적으로 가난, 부패, 독재, 사치, 학살의 나라로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3천 켤레의 명품 구두 수집으로 대표되는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의 사치는 지금까지도 필리핀의 불행의 상징으로 회자되고 있다. 2022년 필리핀의 1인당 GDP는 $3,687로 아세안 10개국 중 베트남보다 아래인 6위에 해당하며,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가 필리핀의 뒤를 따른다 (IMF, 2022). 이 수치는 튀니지, 스리랑카, 팔레스타인, 부탄과 비슷한 수준이다. 마르코스 독재가 만든 필리핀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임에도 필리핀의 유권자들이 그 아들을 지도자로 선택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버지 마르코스의 유산


1965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합법적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집권 초반 차관을 들여와 인프라 구축에 투자하여 경제성장을 시도했고, 실제로 1976년 필리핀은 세계적인 원자재 가격 상승에 힘입어 8.8%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기 집권을 위해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반민주적 행위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경제적 성과는 독재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기억으로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보정되어, 아들 봉봉의 대선 승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984년에 이르러 필리핀 경제가 -7% 이상 역성장하였던 것을 바탕으로, 마르코스 시절이 항상 경제적으로 좋지만은 않았다는 비판도 없지는 않다.

마르코스 가문 Photo by Timetoast timelines

당시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서의 흐름과 같이, 필리핀에서도 1972년 계엄령 이후부터 본격화된 독재정치에 저항이 일어났다. 국가는 반공을 기치로 삼아 남부의 소수 민족 집단을 탄압하고, 야당 인사들을 구금했다.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지 못했으며 인권은 각종 고문과 성폭력으로 짓밟혔다. 마르코스 정권에 대항했던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2세가 망명 중 필리핀 공항에 입국하자마자 암살당했던 1983년 사건은 대규모 민중시위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니노이의 아내인 코라손 아키노가 야당 후보로 1986년 선거에서 압승했음에도 정권 차원에서 마르코스의 승리로 조작하기 위한 시도가 벌어짐에 따라, 다시 시민들이 나섰고 언론, 종교, 군부 등 여러 계층의 지도자들이 동참했다. 이러한 '피플파워' 혁명으로 마르코스 정권은 종식되었다.


피플파워 혁명 - Photo by Jilson Tiu

마르코스 정권은 국제사회에서도 신뢰를 얻지 못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다수의 무슬림이 원주민으로 구성된 남부 민다나오 섬의 무장세력과 충돌 후, 1975년 이슬람협력기구(OIC) 및 아랍 국가들이 중재에 나서 정부와 무장단체(모로민족해방전선, MNLF) 사이에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 정부에 대한 OIC의 원유  금수 조치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공급 중단 위협 때문에 마르코스 정권은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Harish, 2005, 4). 그 결과, 1975년 트리폴리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필리핀 남부 지역에 자치를 부여하는 실행 방법에 관한 협정문 자체의 모호함, 그리고 애초에 실행 의지가 적었던 정권의 태도 때문에 협정은 곧 붕괴되었다. 이는 이후 필리핀 남부에서 12만 명이 사망하고 2백만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킨 2000년대 모로 분쟁의 나비효과가 되었다.


'민주적' 승리의 결과에 대하여


봉봉 마르코스는 선거라는 민주주의 국가의 적법절차로 당선되었다. 아버지와 같이 투표를 조작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82%가 넘는 투표율에서 59%에 해당하는 3146만의 압도적 득표로 승리했다. 봉봉의 압승에 관해 외신과 주요 분석가들이 제시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필리핀의 정치사회적 구조상 식민지 시대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지역 기반의 가문들이 가진 막대한 영향력이다. 북부와 중부를 중심으로 한 마르코스 가문과, 남부를 중심으로 한 두테르테 가문의 동맹이 봉봉과 사라를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둘째, 온라인 플랫폼의 영향이다. 16세부터 64세에 해당하는 필리핀 성인의 91%가 온라인 매체를 이용하며, 평균적으로 하루에 4시간 정도 소셜 미디어에 접속한다고 한다 (Dyer, 2022). 봉봉의 승리에 소셜 미디어를 통한 적극적인 홍보가 작용했다는 분석은 여러 언론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다.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미디어가 동남아 정치에서 극적인 변화를 이끄는 담론의 진원지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서준수, 2022).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정치 가문의 영향력과 소셜미디어의 힘만으로, 59% 유권자들이 마르코스로 몰려갔다는 설명이 충분한 설득력이 있을까? 전문가들의 지적대로, 여기에는 필리핀의 중산층, 특히 독재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투쟁의 과정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기 때문에 봉봉을 지지할 수 있었다는 점도 있다.


다만, 이 관점은 마치 독재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재자의 아들을 인정할 수 있었다는 뉘앙스로 표현된다. 이런 시각은 특히 서구 언론에서 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젊은 유권자들이 정치에 무지하거나 민주화 과정을 경험해보지 못한 미숙함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나이를 불문하고 현 필리핀의 유권자들 자체가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를 경험한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일상에 걸린 민주주의의 미래


2016년 두테르테의 당선과 같은 맥락에서, 마르코스 봉봉의 선택 역시 유권자의 선택이 일상의 회복의 문제에 달려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두테르테의 당선과 이후 마약사범에 대한 초사법적 살해 행위는 인권에 대한 큰 논란과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있었음에도 다수의 국민들은 오히려 그들의 일상에 만연한 범죄와 부패척결로서 지지를 보냈다. 마르코스 봉봉의 선거 과정 역시 서민의 일상을 회복하는 것에 대한 이슈로 전략을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언급된 과거사의 문제도 아픔의 기억보다 추억과 향수로 덧씌워졌다. 소셜미디어에서 아버지 마르코스 시절은 독재의 과오가 있었어도 아시아 2위의 경제대국이자 평화와 번영의 '황금기'였다고 묘사되기도 했다. 진실여부를 떠나 선거 전략의 핵심은 바로 경제에 집중한 일상회복의 문제였다.


실제로 당선 후 필리핀의 새 대통령이 힘써야 할 국정 과제의 1순위는 무엇보다도 경제 문제이다. 필리핀 경제는 두테르테 시기 인프라 투자 및 남부 민다나오에서의 평화협정 실행 등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유지해왔지만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에는 -9.6%의 역성장을 기록했다 (Worldbank, 2022). 팬데믹 이후의 경제를 부흥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후보로서 마르코스에 대한 향수를 보정하는 것으로 유권자들에게 어필한 것이다. 봉봉 마르코스는 당선 후 두테르테 정권의 정책을 이어 대규모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으로 경제 회복을 시도할 것으로 전망되며, 의료보험을 비롯한 여러 사회적 지원에 소요되는 비용과 막대한 에너지 수입으로 인한 재정적자 문제에 대응하는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예측된다 (Atienza, 2022; Guild, 2022).


Photo by Gino on Unsplash

마르코스의 선택은 이런 점에서 필리핀 유권자들의 평범한 일상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이 최선이 아닌 차악의 선택에 있었다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필리핀의 현 세대들이 과거 투쟁적 노력과 희생으로 지켜낸 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거부한 것이 아니라, 경제라는 삶의 기본적 문제 앞에서 권위주의의 그림자는 상대적으로 옅어진 것이다. 민주화 이후 필리핀의 역대 정권을 통해 일반 국민이 체감하는 필리핀의 경제 사정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오히려 엘리트 주도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 더욱 짙어진 21세기의 세계적 현상은 필리핀에 그대로 적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국내 언론의 한 기자는 이 현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실 이런 문제야 필리핀만의 문제겠는가. 필리핀 대선 소식을 단순한 화제성 뉴스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조기원, 2022) 필리핀 대선을 보며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든다면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전쟁과 혼란, 경제적 궁핍과 고난의 심리를 파고들어 집권하게 된 나치 독일을 만든 히틀러가 정계에 입문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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