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운동회
학교가 조용하다. 가끔 하교 시간 학교 앞을 지나갈 때마다 마주하는 어수선함이 영 어색하다. 학교 주변은 곧장 자기네 학원으로 실어갈 승합차들과 학부모들의 차들로 북적하다. 교문까지 걸어 나오는 아이들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든, 제 갈길을 가든 모두 시선이 스마트폰에 꽂혀 있다. 차에 올라타는 아이들의 눈에 영혼이 없다. 학교 공부가 끝나면 학원 공부를 하러 가고, 학원 공부가 끝나면 또 학원 공부를 하러 가는 게 요즘 아이들의 하루 일과라고 한다. 직장을 다니는 부모님보다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게 일상이다. 학교 운동장에 남아 공을 차거나 뛰어노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 교복이든 체육복이든 제 편한 대로 입은 채 책가방을 단상 옆 계단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흙먼지가 날리도록 뛰는 아이가 정말로 단 한 명도 없었다.
지역에 따라 한 학년의 학급 수가 천차만별이겠지만 아직까지 한 학년당 다섯 반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면 운동장이 비어 있다는 게 여간 보기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학교 다닐 적만 하더라도 두세 반이 체육 시간이 겹쳐 하나의 운동장을 놓고 나눠 쓰는 일도 빈번했다. 여학생들은 주로 피구를, 남학생들은 축구나 농구를 했었다.
학교 수업시간엔 공부만 아니면 뭘 해도 좋았던지라 체육 시간은 늘 다른 수업에 비해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운동장에 나가기 싫은 때가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데 바로 운동회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운동회는 계주를 제외하면 줄다리기, 단체 줄넘기, 박 터트리기 등 빨리 승부가 나면서 운동장의 면적을 적게 차지하는 종목들로 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이런 경기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단체 율동이었다. 마치 학교의 명물인 것처럼 고되게 연습을 시켰던 탓에 누구도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매년 진행되는 운동회였지만 특히나 기억에 남는 건 바로 4학년 때였다. 늘 4학년이 전 학년을 대표해서 율동을 보여주던 학년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4학년 때에는 당시 메가 히트곡이었던 엄정화의 '페스티벌' 노래에 맞춰 연습을 했었다. 각자 훌라후프를 하나씩 갖고 4분 정도 되는 노래 한곡에 단체 율동을 담기 위해 몇 날며칠을 5교시마다 운동장에 모여야만 했다. 연습을 위해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학생들로 인해 복도 가득 울리던 나무바닥 복도의 소리는 흡사 건물이 무너질 때 내는 소리처럼 학교 안에 묵직했다.
동작은 별 거 없었다. 훌라후프를 들었다 놓고, 옆으로 뻗었다가 되돌리고, 자리에 내려놓고 맨손으로 율동을 하는 게 전부였다. 훌라후프를 들 수만 있다면 유치원생도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웠다. 단상 위에 대표로 올라가 있던 선생님을 따라 율동을 한 구간씩 차곡차곡 연습했다. 단순한 동작이었음에도 틀리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30명이 따라 해도 한 명쯤은 틀릴 법한데 300명이 넘는 학생들을 틀림없도록 군무를 맞추려고 하니 선생님 입장에서도 여간 쉬운 게 아닐 터였다. 왼쪽으로 가야 할 때 오른쪽으로 간 아이와 부딪히고, 훌라후프를 들어야 할 때 훌라후프 중심을 못 잡아 앞으로 기우는 등 여기저기서 동작을 틀리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담임 선생님들은 동작을 틀리는 아이를 꾸중하고 집중하라 다그쳤다. 그럼에도 또 누가 틀리면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것도 못하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날이 셀 수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은 천천히 4학년을 하나로 만들어주었다. 어제 열 번 틀렸다면 오늘은 아홉 번 틀렸고, 운동회를 앞두고 막바지 리허설을 할 때에는 틀리는 아이가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었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은 아침부터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평소라면 출근했을 부모님들이 모두 학교로 오다 보니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혼잡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학교는 화단이며 통행로, 주차장까지 돗자리를 펼칠 수 있는 자리는 모두 돗자리가 깔렸다. 운동장이 보이는 자리는 이미 발 디딜 틈조차 없어서 엄마와 할머니는 건물 뒤편 주차장에 자리를 펼쳤다. 아침부터 바리바리 싼 도시락통을 돗자리 위에 올려 둔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늘 최선을 다하라는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내가 맡은 큰 역할은 없었음에도 나는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힘차게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공중에 만국기가 교차하는 운동장에서, 오전에는 주로 학년별로 준비한 것들이 진행되었다. 1학년부터 3학년은 각 모서리마다 세 개씩 설치된 박 터뜨리기를 했다. 각 학년 별 키를 고려해서 박이 매달린 높이가 조금씩 달랐다. 모두가 자신들의 박을 먼저 터뜨리기 위해 바닥에 떨어진 모래주머니를 들고 박을 향해 힘껏 던졌다. 여기저기서 박이 하나씩 터지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알록달록한 컨페티가 폭죽 터지듯 쏟아졌다. 그러다 한쪽에서 큰 함성이 들려오면 그쪽의 박 세 개가 모두 열린 것이었다. 1등이 정해지면 단상 위에 있던 진행을 맡은 선생님이 '전체 박수!'를 외쳤다. 운동장을 둘러싼 계단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다른 학년 학생들과 이를 지켜보던 학부모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4학년 차례가 왔다. 4학년이 모여 앉은 계단에 모두가 훌라후프를 세워 놓아서 누가 봐도 훌라후프를 이용한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응원석에서 내려와 운동장으로 걸어 나간 뒤 선생님의 구호에 맞춰 질서 정연하게 오와 열을 맞췄다. 단상 위에 서서 우리에게 율동을 가르쳤던 선생님이 우리를 쭉 한번 훑어보더니 '준비!'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동작 버튼이 눌러진 로봇처럼 반사적으로 훌라후프를 들어 가슴 앞에 갖다 대었다. 페스티벌 노래의 전주 부분인 삼삼칠 박수소리가 나면서 우리의 훌라후프가 일사불란하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나는 부끄러우면서도 실수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열심히 연습했던 율동을 떠올리며 몸을 움직였다.
전 학년이 한 바퀴 운동장을 쓰고 나면 오전 시간이 거진 다 흘러 있었다. 점심시간까지 애매하게 남은 시간 동안엔 곳곳에서 단체전 예선이 치러졌다. 홀수반과 짝수반의 줄다리기, 각 반에서 10명씩 대표를 뽑아 나온 단체 줄넘기가 운동장 곳곳에서 어수선하게 진행되다가 열두 시에 맞춰서 시합이 잠시 중단되었다. 각 반의 담임 선생님들이 자기 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밥 맛있게 먹고 1시 30분에 다시 이 자리에서 보여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오전에 엄마와 함께 자리를 잡았던 학교 뒤편의 장소로 향했다. 그런데 거기에 엄마가 없었다. 돗자리도 다른 사람의 것이 깔려 있었다. 그땐 휴대폰이라는 걸 갖고 있던 아이가 드물었고 나 역시 휴대폰이 없었던지라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그저 걸으면서 엄마를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도 엄마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큰 나무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전에 기억하고 있던 자리에서 내가 당황하며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이쪽이라며 손을 흔들고 있던 것이었다. 문제는 엄마 입장에선 나를 보며 손을 흔든 것이었지만 여기저기서 엄마들이 제 자식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려고 손을 흔들고 있다 보니 오롯이 내 힘으로 엄마를 찾은 것과 다름없었다.
엄마는 땀 흘리느라 덥지 않았냐고 물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 뚜껑을 열어 건네주었다. 평소에는 이 썩는다며 잘 사주지 않던 뿌요 소다였다. 나는 시원하게 목을 축인 뒤 엄마 옆에 앉았다. 도시락은 아침에 먹었던 김밥이었다. 운동회 날 아침밥은 점심을 준비하느라 따로 준비할 수 없어 김밥을 넉넉히 싸 도시락에 넣으면서 그 자리에서 꽁다리며 옆구리 터진 김밥을 주워 먹었다. 소풍처럼 친구들과 모여 앉아 도시락을 보여주며 자랑할 것도 아닌데 엄마는 예쁜 김밥은 도시락 통에 담고 못난 김밥은 각자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래도 막상 밖에서 도시락 뚜껑이 열렸을 때 예쁜 김밥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으니 보기 좋았다. 아침에 만들었다 보니 차게 식어버렸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같은 음식도 밖에서 다 같이 즐겁게 먹으면 맛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엄마의 김밥을 통해 절감했다.
엄마가 만든 김밥도 물론 좋았지만, 운동회나 소풍 때 다른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종종 있었는데 바로 '유부 초밥'을 봤을 때였다. 계란으로 겉을 싼 김밥, 김치나 소시지를 넣은 김밥, 밥과 김의 순서가 뒤바뀐 누드 김밥까지 내 자식을 향한 엄마들의 정성 속에서 시큼한 식초 밥에 야채와 깨를 섞어 넣고 유부에 싼 그 간단한 음식이 당시 친구들 사이에선 인기메뉴이자 고급 메뉴였다. 지금이야 워낙 만들기 쉬워 집에서 편하게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당시엔 쉽게 접하기가 힘들었던 새콤달콤한 음식이었던지라 그것을 싸 온 친구는 그 소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너도나도 자신의 엄마가 싸준 김밥이나 간식을 헌납하며 유부 초밥 한 조각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서, 정작 유부초밥의 주인도 한두 조각 밖에 맛보지 못하곤 했다. 그럼에도 유부 초밥을 통해 누렸던 찰나의 인기가 꽤 달달했으리라.
언젠가 한 번은 나도 소풍 때 유부 초밥을 만들어 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다. 엄마는 김밥보다 편하다며 흔쾌히 만들어 줬었다. 그날 소풍 장소에서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몰려들 친구들 사이에서 엄마의 유부 초밥을 자랑할 마음으로 들떴던 기억이 선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엄마의 유부 초밥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는데 하얀 밥에 깨와 당근이 듬성듬성 붙어 있는 게 볼품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다른 집 엄마들이 유부 초밥에도 다른 재료를 손질해 넣었다는 걸 알았다.
오후에는 단체전 남은 경기가 마무리되고 운동회의 꽃이라 불리는 계주가 진행되었다. 학년별 계주 전에 이벤트성 게임으로 학부모들의 계주가 먼저 진행되었다. 언제 선발된 것인지 운동장 바깥에 서 있던 엄마들이 하나둘씩 운동장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여섯 개의 트랙 라인에 각 학년을 대표하는 여섯 명의 어른들이 나란히 섰고 트랙 안쪽에 각 트랙 라인마다 세 명씩 추가로 바통을 이어받을 어른들이 대기했다. 자기 엄마를 알아본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엄마 파이팅!'을 외쳤다. 떠나갈 듯 시끄러운 운동장 속 수많은 아이들의 목소리들 사이에서 엄마들은 용케도 자기 아이의 목소리를 찾아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엄마들의 계주가 끝나고 1학년부터 순차적으로 계주를 했다. 당연하게도 다른 학년의 학생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내 자식이 더 빨리 들어오길 바라는 엄마들만 잔뜩 흥분해 있었다. 내가 속한 4학년 차례가 왔다. 나는 운동에 별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계주 대표로 선발되지 않았다. 반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에 같이 앉아 반장의 구호에 따라 우리 반 대표 선수를 응원했다.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별로 친하지 않은 아이여도 자기 학년 안에서 누가 달리기를 잘한다느니, 누가 농구를 잘한다느니 하는 건 어디서 자꾸 들려와 나도 모르게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반에는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가 몇 명이나 있더라, 계주는 그 반이 1등을 따놓은 당상이다라는 말이 응원석 곳곳에서 들려왔고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그 반이 1등을 했다. 우리들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심히 응원했지만 뒤바뀌지 않은 결론에 내심 아쉬웠다.
운동회가 마무리되고 시상식이 진행된다며 젼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했다.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해졌다. 운동장 바깥으로는 자리를 정리하는 학부모들로 인해, 운동장 안으로는 아침부터 진행된 야외 행사로 집중력이 흐트러진 아이들로 인해 시상이 진행되는 단상에 제대로 집중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줄은 삐뚤빼뚤하고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로 정신없었다. 선생님들도 제 각기 지쳤던지라 내버려 두는 분위기였다. 단상 위에서 교장 선생님이 건네는 상장과 선물을 받으면 영혼 없는 박수소리가 운동장에 짧게 울렸다가 사라졌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준비한 선물인 필통이며 공책, 연필, 스케치북 같은 부상(副賞)은 받는 학생들도 썩 내켜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지루한 시상이 끝나고 이제 집에 가나 싶으니 교장 선생님의 폐회사가 있겠다는 사회자 선생님의 말에 짜증이 머리꼭대기까지 치솟았다. '존경하는 OO초등학교 학부모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교장 선생님의 폐회사는 끝날 듯 말 듯 15분을 넘긴 상태였다. 정작 존경의 대상이 된 학부모들조차 빨리 운동회가 끝나고 제 자식과 함께 집에 갈 생각에 양옆에 가져온 짐을 둔 채 몸이 들썩거릴 뿐이었다.
이쯤 되면 집에 가겠다는 생각 말고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래먼지 속에 오래 있었더니 입안은 텁텁했고 내가 참여한 것이라곤 단체 율동과 줄다리기뿐이었는데 운동장을 열 바퀴는 뛴 것처럼 몸은 지쳐 있었다.
'끝으로'라고 교장 선생님이 운을 뗐다.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선생님도 지겨우신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를 위해 셀 수 없을 정도로 준비했던 조례 훈화말씀이라든지 개회사, 폐회사가 지금까지 단 하나도 기억에 남는 게 없다는 걸 안다면 교장 선생님은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다.
지루함을 덜어내기 위해 발끝으로 운동장 모래를 파해쳤다가 다시 긁어모아 작은 둔덕 만들기를 반복했다. 마치 높은 언덕인 마냥 그 위에 올라서서 별반 다를 것 없는 주변인데도 마치 더 높은 곳에서 봐서 달라진 게 있는 마냥 만족했다가 이내 내려와 흙을 좌우로 흩어놓았다. 모래 둔덕으로 2센티미터쯤 높아진다 한들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장 선생님은 '끝으로'로 시작해서 10분을 더 연설한 뒤에야 말을 끝마쳤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정말로 우리를 위해서라면 오늘 수고했다는 짧은 말과 함께 끝냈어야 했다. 운동회가 끝나고 우리는 서로에게 안녕을 고한 뒤 각자 부모님에게로 뛰어갔다. 아직 체력이 남은 아이들은 곧장 부모님에게 달려가기보다 제들끼리 술래잡기를 하거나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선생님 눈치를 본다고 용돈을 쓰지 못한 아이들이 뒤늦게 행상으로 뛰어가 닭꼬치며 주스며 먹고 싶은 걸 사 먹었다. 점심때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뛰어놀고 나면 배고플 나이었던 데다가 그 나이 땐 엄마가 해준 음식보다 달달한 군것질이 더 매력적인 법이었다.
나 또한 친구들과 어울려 닭꼬치 하나를 냉큼 해치웠다. 옆에서 종이컵에 번데기를 먹던 친구가 이쑤시개에 번데기 2개를 꽂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번데기의 징그러움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못 먹는다 했다.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냐고 하던 친구는 종이컵 바닥에 고인 국물까지 탈탈 털어 마셨다.
운동장이 조금씩 한산해지고 기다리다 못한 엄마들이 운동장으로 들어와 제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집으로 데려갔다. 나는 주스까지 한 잔 해치운 뒤에 엄마에게 돌아갔다. 내가 한 것이라곤 다 같이 하던 율동과 줄다리기뿐이었는데도 엄마는 오늘 고생했다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가운데에 있어서 내가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엄마는 내가 가장 잘 추더랬다. 나는 괜히 쑥스러워서 웃기만 했다.
운동회는 짧은 시간에 협동, 선택과 집중, 승리와 패배를 경험해 볼 수 있는 체험의 장이었다. 어떤 종목에 뛰어난 사람을 응원해 주는 마음을 배우기도 했고 하기 싫은 일도 하나가 되어해 볼 수 있었고 승리의 달콤함과 패배의 쓴맛도 느껴볼 수 있었다. 분명 운동회를 연습할 때만 하더라도 싫은 것들 투성이었는데 정작 행사 당일이 되면 운동장 가득한 에너지에 나도 동화되어 들떠하고 즐겼던 것 같다. 복도에서 뛰지 말라, 교실에서 소리치지 말라 억압받던 것들로부터 벗어나 이날 하루에 온전히 쏟아낸 것 같기도 했다.
요즘 운동회나 체육대회는 다 무승부로 끝낸다던데, 누군가의 노력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의마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과 같은데 누가 이기려 노력하겠나 싶었다. 아무런 결과도 없는 것을 향해 달려가니 응원할 맛도 나지 않을 것이다. 지나가며 바라보는 텅 빈 운동장이 패배를 경험시킬 바에 아무것도 겪지 못하게 하겠다는 그들의 마음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