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때

4. 화투

by 안온

1년에 몇 번 손에 꼽을 정도로 할머니집에 친척들이 많이 모여드는 날이 있었다. 설날과 추석, 그리고 나는 얼굴조차 모르는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의 제삿날이 그런 날이었다. 엄마를 포함한 여성들은 부엌에서 음식을 하고 남자들은 안방에 둘러앉아 요즘 근황이나 세상 돌아가는 것들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처럼 여기도 저기도 끼기 힘든 아이들은 거실에 모여 이것저것 갖고 온 것들이나 할머니집에 있는 블록으로 이것저것 만들어 놀았다. 그러다가 전을 부치고 튀김을 튀기는 그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부엌으로 몰려가 새우튀김이며 산적이며 하나씩 얻어먹었다. 하나만 먹어야지 하고 갔다가 맛대로 하나씩 집어 먹고, 또 맛있는 건 서너 개씩 손대다 보면 밥때가 되기도 전에 배가 볼록해졌다. 엄마나 고모가 제사상에 올릴 것도 없겠다고 야단을 치면 그제야 아쉬운 듯 물러났으나 이미 먹을 만큼 먹은 터라 아쉬움이 없을 때였다. 식사는 제사(또는 차례)를 지낸 후에야 먹을 수 있어서 그때쯤이면 이미 식사 시간이 몇 시간이고 지난 뒤였던지라 아마 부엌에서 요리하던 어머니들도 제 자식들 그때까지 배 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배부를 때까지 집어먹어도 별소리 안 하다가 이만큼 먹였으면 밥 달라곤 안 하겠다 싶을 때쯤 으름을 놓았던 것이리라.

제사가 끝나면 늦은 시간이어도 다음 날 일정을 위해 대부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명절 차례의 경우 아침에 치르는 데다 뒤로 연휴가 더 남아있어 할머니 집에 한참을 앉아있다 돌아가는 친척들이 많았다. 의례적인 모든 것들이 끝나고 밥을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한 만큼 마음도 여유로워져서 한 방에 다 같이 모여 누가 대학에 갔더라, 누가 결혼을 했더라 하는 겉도는 얘기가 돌다가 그 화살이 여기 있는 우리들에게 돌아오곤 했다. 삼촌이든 고모부든 간에 매년 얼굴을 보면서도 어른들은 내게 올해 몇 살이냐고 물었다. 나는 몇 살입니다 대답했고, 그럼 또 공부는 잘하냐는 뻔한 질문이 되돌아왔다. 그러면 이때다 싶어 엄마가 이 놈이 이래 보여도 공부머리는 있는 것 같다고 나를 치켜세웠다. 그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건 아니었지만 엄마 흥이 식지 않도록 가만히 있었던 건 어린 나이에도 깊게 생각한 배려였다.

매년 통과의례 같은 질문들이 끝나면 공부 열심히 해라는 덕담과 함께 어른들의 지갑이 열렸다. 누구는 오천 원, 누구는 만 원. 삼만 원을 꺼내는 어른이 있으면 감사 인사를 할 때 허리가 절로 90도로 꺾이기도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초등학생이어도 돈은 좋은 것이었다.

그렇게 알맹이 없는 얘기들이 한 바퀴 돌고 나면 '여기서 나는 할 거 다 했소' 선언하듯이 자리를 뜨는 어른들이 생겼다. 그때도 지금도 이름조차 모르는 친척들을 배웅하고 나면 남은 친척들은 거의 할머니의 직계가족들 뿐이었다.

갈 사람은 다 갔겠다, 삼촌이 익숙하게 TV장 서랍을 열어 화투를 꺼냈다. 남은 사람끼리 한판 할까. 삼촌의 목소리가 커진 것이 흥분에 들뜬 듯했다. 엄마가 방구석에 잘 개어져 있던 초록색 군용 모포를 가져와 방 한가운데 널찍하게 펼쳤다. 담요 가장자리로 어른들이 둘러앉는다. 할머니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이번에 돈 따면 절대 안 돌려준다'라고 사뭇 진지하게 으름을 놓으셨다.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패가 어지러이 바닥에서 섞였다가 다시 한데 모였다. 그리고 담요 위에 길게 펼쳐 놓았다. 모두가 한 장씩 골라 뒤집는다. 삼촌이 낮일밤장이니 내가 선이군, 하며 다시 화투를 그러모아갔다.

나와 사촌들은 각자의 부모님 옆에 찰싹 붙는다. 삼촌이 패를 돌리는 동안 어른들은 지폐며 동전이며 갖고 있는 것들을 싹 꺼내 자신의 무릎 앞에 쌓아두었다. 그중에서도 할머니가 가장 압도적이었는데, 다른 어른들이 천 원짜리며 오천 원짜리에 몇 없는 동전을 싹싹 털어 꺼낼 때 할머니는 동전주머니에서 오백 원짜리와 백 원짜리 동전을 양손으로도 다 못 쥘 정도로 쏟아내셨다. 동전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짤랑거리는 소리에 다른 친척 어른들 뿐 아니라 어린 나의 시선도 집중되었다.

할머니 집에 놀러 갈 때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때론 할머니와 엄마가, 때론 셋 모두 둘러앉아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화투를 칠 때가 많아서 어깨너머로 구경한 짬이 있는지라 규칙은 잘 알고 있었다. 끼워만 준다면 당장이라도 이 어른들 사이에서 내 화투 실력을 뽐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른들은 나와 사촌들이 끼워달랍시고 말을 걸면 애들은 하는 거 아니라면서 딱 잘라 말했다. 손에 쥔 패 중에 바닥에 놓인 패와 같은 것을 맞춰 가져와 점수를 내는 방식은 내가 주로 하는 게임보다도 단순했지만 작게나마 돈이 오간다는 것 때문에 어른들의 게임으로 굳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엄마의 패를 구경했다. 패를 펼쳐 본 엄마의 입에서 한숨이 나온다. 패와 패가 부딪혀가며 자리 앞에 얻은 패들이 쌓이고 무너지길 반복했다. 그동안 엄마의 무릎 앞에 놓인 지폐가 동전으로 바뀌었다가 사라지고 또 동전으로 바뀌었다가 사라졌다. 좋은 패가 들어와도 뒷패가 붙질 않아 점수를 크게 내지 못했고 패가 나쁠 땐 크게 잃었다. 계속해서 돈을 잃으면서 엄마는 말수가 줄어들었고 어린 내가 봐도 당연히 내야 할 패를 지문이라도 남길 기세로 엄지와 검지로 꾹 누른 채 낼지 말지 갈등했다. 엄마가 계속 돈을 잃는 게 안쓰러워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말이라도 걸면 엄마는 이때다 싶어 내게 역정을 냈다. 그러면 돈을 가장 많이 딴 할머니가 왜 괜한 손주한테 화를 내냐며 감싸주었다. 나는 울상이 되어 할머니 옆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화투의 끝은 늘 좋지 않았다. 잃은 사람은 괜한 성질을 부렸고 많이 딴 사람은 느긋하고 푸근해졌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돈을 그러모으고, 어느 날은 엄마가, 어느 날은 할아버지나 삼촌이 그러모아서 각자가 돈을 딴 날들을 세어보면 대동소이했다. 오늘 잃었다고 해서 매번 잃은 것이 아니고 오늘 돈을 땄다고 해서 매번 딴 것도 아닌데 진 사람은 어찌 매번 괜한 성질을 부렸다. 그런데 딱 화투를 정리하고 펼쳐놨던 담요를 접어 정리하는 순간 어른들은 그때 느꼈던 감정들조차 정리했다는 듯 화투를 치기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그게 참 신기했다.


맞고든 고스톱이든 돈이 걸린 게임에서는 손도 댈 수 없던 화투였지만 할머니 집에 나만 덩그러니 맡겨지는 날에는 할머니가 선심 쓰듯 화투를 꺼내 갖고 놀게 해주곤 했다. 혼자서는 포커카드로 할 수 있는 클론다이크와 비슷한, 동일한 꽃무늬를 찾아 순서대로 정렬하고 빼는 게임밖에 할 수 없었는데 재밌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둘이 하는 양 패를 이쪽저쪽에 펼쳐두고 맞고를 하는 것도 재밌지 않았다. 상대의 패를 상상하고 내가 필요한 것들을 모으며 승기를 잡아가는 것이 맞고의 재미인데 홀로 나는 갑이고 을의 패는 모른다, 나는 을이고 갑의 패를 모른다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해서 봤던 패를 잊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재미가 없어 시무룩하게 앉아있으면 할머니가 슬그머니 다가와 같이 하자고 물어봐 줄 때가 있었다.

우리는 돈 대신 손목 맞기를 벌칙으로 정했다. 할머니는 그걸 침대 맞기라 불렀다. 침대로 어찌해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침대 맞기냐고 물으니 때리기 전에 대나무처럼 세운 엄지와 검지에 하- 하고 입김을 불 때 침이 묻어서라고 할머니는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실제로 손목을 때리기 전에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넣었기 때문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친구들끼리의 게임 벌칙으로 손목 맞기를 할 때에도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손가락에 입김을 분 뒤 내려쳤다. 그리고 그들 모두 그 벌칙을 침대 맞기라 불렀다.

아무튼 할머니와 나는 점당 한 대라는 꽤 가혹한 벌칙을 걸고 맞고를 쳤다. 상대가 있으니 여간 재밌는 게 아니었다. 할머니가 이기면 내 손목을 잡고 '짝!' 하는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때렸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어떻게 손주를 아프게 했겠는가. 소리는 요란한데 희한할 만큼 통증은 없었다. 할머니의 손이 채찍처럼 내 손목을 감싸 쥐는 정도, 딱 그 정도 느낌이었다. 나 또한 내가 이겼을 때 소매를 걷는 할머니의 손목을 매몰차게 때리지 않았다. 침대 맞기라는 벌칙은 이 화투놀이가 조금 더 재밌길 바라는 마음에 내 건 형식상 판돈 같은 것일 뿐이었다.

그렇게 할머니와 맞고를 치다 보면 할머니도 흥이 올라서 이것저것 가르쳐주곤 했다. 불리할 땐 이걸 먼저 모으는 게 좋단다, 유리할 때에도 상대방이 무엇을 모으고 있는지 잘 보고 있어야 한단다, 같은 말들을 할머니는 패를 섞는 동안 설명해 주셨다. 나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쌍피라든지 광이라든지-만 모으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내가 쥐고 있는 것 안에서의 좋은 패, 나쁜 패만 생각했는데 하면 할수록 다양한 수를 알아야 하는 게임이라는 걸 할머니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할머니 집에 모이게 되는 날이면 친척 어른들에게 용돈 받는 것 다음으로 기대하는 것이 바로 이 화투판을 구경하는 게 되었다. 쥐고 있던 패가 좋지 않아 정강이 앞에 모아 놓은 화투패가 초라해도 '이게 딱 붙네!' 하면서 판을 뒤엎던 삼촌, 뒷패가 잘 붙어 신이 나다가 갑자기 '쌌다!'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쓸어내리던 고모, '저게 왜 저리 붙노' 사투리 섞인 불만을 중얼거리던 할머니. 화투판에는 그 판에 휩쓸려버린 어른들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었다. 그리고 판이 끝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서로를 챙기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구경의 재미는 깔끔하게 마침표를 찍는다. 가족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그 잠깐의 화투판에서 나는 가슴 깊이 뜨겁게 느꼈던 기억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남아 있다.


이제 내가 그 자리에 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할머니는 화투를 치실만큼 오래 앉아 있을 수 없게 되었고 삼촌은 돌아가셨다. 명절이라고 할머니집으로 오는 친척들도 몇 없다. 오더라도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인사를 주고받고 차가 식기도 전에 들이켜 마신 뒤 서둘러 헤어지고 나면 명절인데도 할머니 집은 금세 평소처럼 적적해졌다. 나만 화투패를 주고받으며 나누던 그 말들, 감정들이 그리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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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에서 부르던 '침대 맞기'는 정식 표준어가 없고 각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고 합니다. 바늘 침에 막대를 뜻하는 대 자를 써서 막대로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나고 침을 맞는 듯이 아프다고 해서 침대 맞기라는 말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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