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이별을 당한 적이 있었다.웬만해서 그 기억은되씹으려 하질 않는데 옛날드라마 다시 보기를 하다가 그때 생각이 스쳤다.
"당신 부숴버릴 거야."
나에게도 부숴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군대 2년 2개월을 기다렸고,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20대 초반을함께했던 친구였기에,그만큼 순수했기에배신감 또한 말로 다할 수없을 만큼컸고그로 인한 상처는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애와 긴 시간 연락이닿지 않아 같이 있을만한 친구에게 삐삐를 쳤더니 조금뒤에 음성메시지로 이별통보가 왔다. 잊어버리고 싶은데 그때 그 음성이 토씨하나 빠지지 않고, 말을 하다 어느 부분에서 몇 번 머뭇거렸는지 까지모두기억이난다.
*너 왜 내 친구한테 연락해? 하지 말랬잖아. 그리고 우리 이제...... 우리 이제 헤어져. 이제 더 이상은...... 싫어!"
욕이나 질퍽하게 해 주고 이별에 동의했다면가슴에맺히지 않고다른일상들 속에흩어져버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모질지가 못했던 건지,진짜 바보였던 건지......울고, 매달리고, 질척거리고,온갖 진상은 다부렸었던 것 같다.
달라지고 예뻐진 모습을 보여주면 맘이돌아설까 하는어리석은 생각으로 유행하는체리레드립스틱을 시뻘겋게 바르고 김혜수 웨이브를 하고 만났던 날.그 애는소름 끼칠 정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마치 영화페이스오프에서존 트라볼타의 선과 악을 완벽하게 넘나드는 명연기를 보는 것 같이.연애할 때는 늘 옆에 바짝 붙어 앉았었는데갑자기 마주 보고 앉아날 당황하게 하더니눈빛으로 맘이 떠났다는 기운을 담은 레이저를 인정사정없이 쏘아댔다.가슴이 뻥뻥 뚫어져너덜너덜해질 정도로......커피숍에 30분 정도 앉아있었을까?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그를 보며 찢어지는 맘을 숨긴 채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했던 기억이 난다.
"너 집에 껌 붙여놨냐?"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걸 직감했기에 그 애의 마음을 돌려보고자밤새 준비한얘기를하나하나 꺼내놓고 있는데 내가 하는 말들은단단한 방패에 맞은 화살처럼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동댕이쳐졌다. 단한 글자도 가슴을 통과하지 못한 채.
늘 나를 바래다주던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에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주먹을 쥐고 내손을 거부하던 그 애의행동은 나를 복받쳐 오르게 만들었다.결국나를전철 안으로 밀어 넣고 황급히 반대편 플랫폼으로 사라져 버린그는안양으로 가는 전철을 타려는듯 보였다.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이별의 이유가 된 동아리후배가 명학역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겁이 나서 묻지도 못한 채 나는 점점 더 피폐해져만 갔다.
신께서그런 나를 가엾게 보셨는지 빨리 단념하라는 게시를내리신 듯했다. 우연히 손 가는 대로 누른 삐삐음성 비밀번호가 맞아떨어져그 애의음성 사서함에들어갈 수 있었고 혀 짧은 목소리의 여자음성이 녹음돼 있는 걸확인할 수 있었다.
"오빵. 나 지금 인났어.ㅇㅇ이 너무 많이 자 가지고......"
분명 우연일 텐데 이용의 '잊혀진계절'처럼 하필10월의 마지막 날.난 그렇게 이별을 했다.눈을 감았다 떠보니 겨울이 찾아와 있었고뼛속까지차가워지는 것 같은, 태어나서 가장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누군가 나를 겨냥하면서 작정하고 만든 게 아닐까 싶은 어느 신인가수의 노래를 우연히 들었던 날,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흐느낌이 딸꾹질이되었고 멈추지 않는. 구역질에 목안까지 얼얼하게 아파왔다.
박상태의 나와 같다면은 내게 그런 노래다.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내 스물네 살의 BGM 같은아픈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