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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희 Aug 25. 2023

쫄면을 주문하는 남자

철이 없던 20대 초반, 나는 식당에서 쫄면을 주문하남자를 싫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남자를 가늠하는 기준에 속했다는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아무리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라 할지라도 그 멋진 입술에서 " 나는 쫄면 " 란 말이 튀어나오면 왜 그렇게 싫던지. 시뻘건 고추장을 입에 묻혀가면서 질근질근 면을 이로 짓이겨 끊어내는 모습은 남자의 이미지를 단숨에 반토막 나게 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학원을 다닐 때였다.

그는 학원실장님의 대학 동아리 동기였다.당시 나는 온몸이 찢어발겨지듯한 독한 실연의 아픔을 처방전도 없이 홀로 치료하고 있는 중이었고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단지 그는 술자리에서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175 정도 되어 보이는 키, 매력적이지도,  호감이 가는 외모도 아니었지만 당장 누구와 만남을 가져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내게 쓸데없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다는 말을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술자리를 파하고 다음 날 실장님께 그와의 자리를 먼저 부탁했고 그도 내가 싫지는 않았는지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런 만남은 갖는 게 아니었다.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였는지,  그 남자가 원체 나랑은 안 맞는 사람이었던 건지 만날 때마다 싫은 점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약속장소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를 기다리는 삐딱한 자세, 바닥에 끌릴 듯 말 듯 한 면바지 밑으로 둔탁하게 드러나는 통굽구두, 커피숍에서 서비스로 나온 조각 케이크를 혼자서 다 먹어치우 모습, 연출된 영화장면처럼 바람 불면 날리는 옆머리에 지나치게 수에 찬 눈빛, 그리고 그가 입버릇처럼 자주 하던 말.

"나는 서른다섯 살까지 성공 못하면 자살해 버릴 거예요."

얼핏 들으면 성공에 대한 의욕이 가득한 것 같지만 내가 느끼기엔 비관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나를 위해주는 마음이 와닿을 때도 있고 올바른 소리를 할 때면 우러러보이기도 했기에 그렇게 야멸차게 헤어져버릴 생각은 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신촌의 어느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벌어졌다.우리는 유유히 떡볶이, 수제버거, 초밥 등 갖가지 음식들탐색하고 있었다. 아직은 어색했던 그 사람 앞에서 최대한 먹기 쉬운 음식을 살피고 있던 차에 그가 도시락을 먹자고 제안했다.  여기 도시락이 맛있고 유명하다면서.갖가지 반찬들이 먹음직스럽고 예쁘게 담겨있는 도시락을 보니 군침이 돌았고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께 도시락을 주문했다.  준비가 다 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고 계산은 후에 하기로 하고 두리번거리며 다른 음식들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발길을 멈춰 섰다.

"우리 이걸로 먹어요."

그 음식은 쫄면이었다.

"도시락은 어쩌고요."

"괜찮아요. 아마 다른 사람한테 팔 거예요."

하고많은 음식 중에 쫄면을 주문했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무책임함이  문제였다. 몇 번 만류해 보았지만 결국은 그의 뜻대로 그는 쫄면을,  나는 김밥을 들고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뻘건 고추장을 입술에 묻히고 먹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사투를 벌이듯 김밥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오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남자가 걸어와 우리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거였다. 아뿔싸! 도시락집 사장님이었다.

"아니, 도시락 다 만들고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다른 걸 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젊은 사람들이 너무하네."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수저를 입에 문채로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눈동자는 갈길을 잃고 그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쫄면 고추장만큼이나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어색하고 껄끄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맛도 느끼지 못한 채 김밥을 억지로 구겨 넣고 난 그날, 나는 급체로 호되게 고생을 해야 했다.


드르륵 활명수 병을 억지로 따다가 뚜껑에 손을 베어 갈라진 틈새가 벌어져 쓰리고 아팠다.그때 갑자기 고추장이 은 그의 입술이 떠올라 찌푸려진 얼굴로 활명수를 단숨에 들이켜버렸다.  따끔거리며 전신을 타고 콸콸 흘러들어 가는 느낌에 몸서리가 쳐지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뭐든지 억지로 하려 하면 안 되는 거구나.


물약이 묻어 끈적해진 손을 닦는 동안 상처에 닿는 물은 베인곳을 더 아프게 했다. 실연의 아픔을 잊으려고 만났던 그는 상처에 흘러 들어간 물처럼 이별의 아픔을 더 쓰릿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 만남이 두려워진 나는 오랫동안 지독히도 외로운 20대를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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