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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Aug 26. 2024

꼬박 두 달, 울트라 하드 랜딩

자발적 한시적 백수의 런던 표류기 9

2월 15일 아침, 느닷없이 집주인 M이 연락해왔다. 이른 아침부터 또 무슨 안 좋은 신호인가.


"굿모닝. 냉장고 설치하러 오늘 아침 8시에 가겠다는데 괜찮니?"

"7시 15분에 연락해서 잠시 후에 오겠다고? ㅋㅋㅋ ㅇㅇ 무적권 콜이야. 고마워 M."


"설치 완료. 나 이제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어. 고마워."

"ㅇㅇ 잘 됐네. 설치 회사 말이야. 전에 갔던 애들은 콘센트에 전원 연결하기가 어렵다고 그냥 가버렸다니까? 정말 실망했어. 요즘은 기본도 안 된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무슨 일을 하기가 너무 어렵다."

"(미안하다는 말을 참 희한하게도 돌려서 하네. ㅇㅇ 니 잘못은 아닌 걸로 하자)먼 길을 돌아 왔지만 아무튼 우리는 해냈어 M."

"As you say, onwards and upwards."


그래 하나하나 해결이 되어가기는 하네. 이제야 집안 꼴이 좀 정상화된다. 마음의 평화.


활동 흔적이 없다 여전히

그리고 2월 18일. 일 주일만에 다시 찾아온 방역 업체 직원의 바지는 여전히 꼬리뼈 쯤에 걸쳐 있었다. 안 볼란다. 흉한 꼴을 보지 않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이롭다. 그러잖아도 난 런던에 온 뒤로 충분히 괴롭다. 그런데 이 자는 왜 부엌 바닥에 엎드려서 한참을 갸웃거리는가.


"흠 이거 정말 이상하네."

"왜 왜 무슨 일이야? 죽은 쥐가 또 있다고만 하지 말아 줘. ㅜㅠ"

"다행히 그렇지는 않아. 쥐가 활동한 흔적이 전혀 없어."

"쥐약을 전혀 안 건드렸다고?"

"응. 형광물질 발자국도 없어. 먹이를 많이 먹지는 않더라도 보통은 통 안에는 들어왔다 나가거든. 그럼 발에 형광물질이 묻은 채로 돌아다니게 된다고. 자외선 플래시를 비추면 이동경로가 쭉 보이게 되는데, 없어."

"좋은 소식이야 나쁜 소식이야 그게?"

"글쎄. 쥐들이 우리 생각보다 굉장히 똑똑해. 사람의 손이 닿은 게 확실하다 싶으면 안 건드리기도 하거든. 이 집에 쥐가 정말 없다면 좋은 소식이고 쥐들이 우리가 놓은 게 먹이가 아니라 독약이라고 확신해서 안 건드린 거라면 나쁜 소식이지."

"임페리얼 컬리지가 바로 옆이라 그런가 쥐들도 ph d 학위라도 있는 거야?"(그렇다 나는 이 와중에도 농담을 건넨다)

"ㅋㅋㅋ 그런가봐. 박사 쥐들인가봐."


방역 업체 직원은 해맑은 표정으로 '기다림 한 주 더 연장' 형을 선고했다.


"똑똑한 쥐들을 일주일 더 시험해보자. 쥐약을 새로 바꿀게. 통도 새 걸로 바꾸고. 통을 놓는 위치도 좀 바꿀 거야. 주의사항은 알지? 다음주에 봐."


나는 집주인 M에게 연락했다.

"M, 새로운 쥐 흔적은 없었어. 방역 업체 직원이 다음주에 다시 오겠대. 이거 좋은 소식일까?"

"굿 뉴스가 학실합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15년 동안 그 집에 쥐 문제는 없었어. 구멍이 있다면 막기만 하면 되겠다!"


그래 그렇게만 되면 좋겠다. 이 집에 이사 온 게 벌써 한 달 전이다.


눈에 뵈는 게 없는 쥐는 밝은 곳으로 나온다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나는 별 공부를 다 한다. 쥐약을 먹고 죽어가는 아이들이 왜 인간이 있는 거실 바닥으로 기어나오는가. 시골집 쥐들은 천장 위에서 뛰어다니지 사람 앞으로, 밝게 조명이 켜진 방으로 내려오는 법이 없었다. 적어도 사람이 있을 때는 말이다. 런던 쥐들은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인가? 검색을 시작한다.


아니었다. 약기운 때문이었다. 쥐약은 항응고제다. 주 성분은 플로쿠마펜이나 쿠마테트라릴. 혈액이 굳지 않게 하는 약물. 쥐약을 치사량 이상 먹은 쥐는 2~3일 후부터 본격적으로 약기운이 나타난다. 몸 속 비타민K가 다 소모된 뒤부터 본격적으로 기대 효과가 나타난다나. 내출혈이 일어나며(그래서 내가 생포한 쥐가 그렇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점차 혈관이 파괴된다.


곧 가장 가는 혈관인 눈의 혈관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서서히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쥐는 밝은 곳으로 나와서 결국 죽음에 이른다.


쥐약의 작용 기작을 감안하면, 아마도 우리가 입주하기 전후, 높은 확률로 입주한 뒤에 집에 들어 왔겠다. 집안엔 쥐약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치사량의 약물을 먹은 채로. 입주 청소를 하는 사람들이 문을 열어놓은 사이에? 혹은 우리가 외출했다가 들어오면서 잠시 문을 안 닫은 틈에? 알 수 없다.


이 집엔 쥐가 없어

2월 25일

"이번에도 전혀 안 건드린 거야?"

"ㅇㅇ 전혀. 내가 자외선 플래시를 켤 테니까 봐. 우리가 쥐약을 놓으면서 한두 개씩 흘린 형광물질이 보이지? 쥐 발자국은 어디에도 없어. 통 안쪽도 봐. 쥐약에 이빨 자국 하나 없어. 쥐가 있다면 이럴 수는 없거든. 너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축하해."

"죽은 채로, 그리고 죽어가는 상태로 발견된 애들은 그때 그럼 어딘가에서 들어온 아이들 전부였구나?"

"아마도. 이 동네 쥐들이 다 어디로 떠났나봐. 다른 집도 비슷해. 흔적이 없더라고."

"집단 멸종이면 좋겠다. 고마워."

"집단 멸종이면 안 되지. 내 일자리인데."

"아냐, 너 플래시 켜는 거 있어 보여. 런던 경찰청 CSI에 지원해봐. 진짜 소질 있어 너."(그렇다 이 와중에도 난 농담을 한다.)

"으하하 오늘 들은 얘기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 고마워. 잘 지내."


방역업체 직원은 쥐들이 나온 통로로 내가 지목한 거실 붙박이장과 벽 사이 틈을 봉쇄하고 떠났다. 외부에서 들어올 만한 구멍은 없다. 이걸로 끝. 박사 쥐야, 다시는 보지 말자.


그리고 집주인  M은 예상 외로 흔쾌히 쥐잡이 비용을 내 줬다. 다만, 첫 달 월세의 절반을 돌려달라는 나의 청구는 기각했다. 대신 우리 가족이 냉장고도 없는 불편을 참으며 마음 고생한 보상으로 300파운드를 챙겨줬다. 이 정도로 만족 하자. 귀찮다.


정착은 끝났다. 꼭 두 달이 걸렸다. 히드로에 내린 12월 26일부터. 집 계약 직전에 파기하고 보증금을 날리고. 두 번 이사를 하고, 냉장고를 설치하고 쥐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꼬박 두 달. 엄청난 하드랜딩이었다. 이제부터는 홈 스윗 홈에서 런던 1년 살기를 즐겨보자. 남은 기간은 딱 열 달 뿐이다.  M 말마따나, "As you say, onwards and upw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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