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한시적 백수의 런던 표류기 10
런던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은 세계적 수준의 다양한 공연을 손쉽게 즐길 수 있다는 데 있다. 곳곳에 널린 공연장은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까지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건축적으로도 아름답다. 꼭 가봐야 하는 런던의 공연장들을 정리해보자.
일단 내 이웃에 있는 곳부터. 매년 여름 클래식 음악제인 프롬스가 열리는 로열 알버트홀이다.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물' 중 하나로도 꼽혔다고 한다.
일단, 거대하다. 아레나 바닥에서 돔 천장 꼭대기까지 높이 47미터, 건물 직경은 80미터가 넘는다. 좌석 5272개가 설치되어 있고, 아레나까지 가득 채우면 최대 관객 8천 명까지 수용한다고 한다. 콜로세움에 돔 지붕을 얹은 구조라고 생각하면 된다.
알버트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이름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새 공연장을 지으면서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헌정한 것이다. 로열 알버트홀 바로 길 건너에는 거대한 알버트 동상이 홀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은 동상 쪽에서 바라본 홀의 모습이다.
초석을 놓은 것은 1867년 5월이었다고 한다. 이날 여왕이 놓은 초석은 지금도 로열알버트홀 객석 Stalls K의 11번째 줄 87번 의자 아래 노출되어 있다.
첫 공연은 1871년 2월 25일에 청중 7천 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 공연장의 음향을 시험할 목적이었던 이 공연에는 아마추어 악단이 참여 했다.
공식 개관행사는 한 달쯤 뒤인 3월 27일 열렸다. 웨일스 왕자가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을 대신해 홀 개장을 선언했다. 여왕이 참석했지만 10년 전에 사별한 남편 알버트가 떠올라서 말을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돔은 철근으로 뼈대를 만들고 유리를 덮은 구조인데 무게가 600톤이 넘는다. 1869년, 그 시절에 이런 거대한 돔 지붕을 얹은 것이다. 이 돔은 세계대전을 두 번 겪으면서도 원형 그대로 살아 남았다.
공연장 전체를 덮은 돔은 아름답고 구조적으로 안정됐지만, 소리가 계속 울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객석 어떤 자리에서는 소리가 최대 1분까지 계속 울려서 들렸다나. 이를 방지하기 위해 지붕 안쪽에 일종의 반사판을 설치한다. 버섯이 매달려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머시룸이라고 부른다.
무대 뒤편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자리잡고 있다. 파이프 갯수가 9,999개에 이르는 이 오르간은 설치 당시에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현재도 영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크다.
‘the voice of Jupiter'라는 별명은 1960년대 비평가가 붙여줬다. 목성의 목소리. 오케스트라의 일부가 아니라 오르간 단독으로 연주하는, 혹은 합창의 반주 정도로 참여하며 오르간 소리가 도드라지는 공연을 볼 것을 권한다.‘
오늘도 로열알버트홀은 프롬스에서 클래식 음악이 주는 감동과 환희로 가득하다. 프롬스 이후에도 클래식과 대중음악 등 각종 연주는 물론 발레 공연, 서커스 등 여러 행사가 거의 매일 열린다. 때로 영국 주요 정당들의 정치 집회까지.
올해 프롬스에만 조성진, 임윤찬, 클라라 주미 강 등 연주자가 참여했다. 이 공연에는 영국과 유럽에 사는 한국인 뿐 아니라 한국에서 온 분들도 적잖이 함께 즐기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내 지인도 런던에 온 김에 임윤찬 연주를 찾았다.
음악에 흥미가 없다 해도 건물 곳곳에 새겨진 역사와 건축적 요소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공식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되니 런던에 들른다면 방문해볼 만하다. 1시간 동안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홀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비용은 19파운드다.
1901년에 문을 연 콘서트홀. 독일 피아노 회사의 의뢰를 받은 영국 건축가가 설계했다. 당시에는 피아노 전시장도 바로 옆에 있었다고 한다. 사회에, 음악인들에게 공헌도 하고 자신들의 제품도 뽐내는 기획. 아름답다.
피아노 회사가 마음먹고 지은 만큼 이 공연장은 특히 음향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500회 넘는 음악회가 매년 무대에 오른다. 확실히 음향이 안정된 덕분인지, BBC 라디오에서 매주 콘서트를 중계한다.
규모는 아담(?)하다. 홀과 발코니를 포함해 545석이다. 공연장은 기둥 없이 둥근 지붕을 얹은 직사각형, 간결한 구조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무대 뒤편 천장을 장식하는 큐폴라(원형 돔)다. 구조적으로는 무대의 음향을 증폭해 직사각형 홀 끝 먼 자리와 발코니의 관객에게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할 테다.
큐폴라를 가득 채운 그림 중앙에 머리 위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인물은 음악의 영혼이라고 한다. 좌우에서는 에로스와 프시케가 음악가에게 영감을 주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어서 심미적으로도 만족감을 준다. 날개 달린 신이 에로스, 프시케는 인간 여성이다. 신계와 인간계를 넘나드는 사랑, 그 커플에게 영감을 받는 작곡가와 연주자. 얼마나 아름다운 상징인가?
한국인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위그모어홀 표 구하기 경쟁이 벌어진 때가 적잖았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소프라노 조수미도 물론 이 무대를 거쳐 갔다. 조성진은 2021년에 연주를 했다. 2024년 4월 8일 임윤찬 연주회는 불행히도 임윤찬의 손가락 부상으로 취소되기도 했다.
이렇게만 쓰면 위그모어홀이 엄청난 아우라를 가진, 범접하기 어려운 공간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도 않다.
공연장에 가보면 편안한 옷차림을 한 동네 노인들의 사랑방처럼 보인다. 2~3세 아이와 부모를 위한 6~8파운드짜리 공연도 주기적으로 열린다. 아이들이 울든 돌아다니든 상관 없이 연주자들은 음악을 연주하리라. 육아에 지친 부모를 위해서도 그만한 선물은 없을 것 같다.
내가 아는 한 옷차림에 대한 제한도 없다. 마스터클래스 형태로 많은 저명한 음악가가 차세대 음악인들을 위한 공개 강좌를 열기도 한다. 이 강좌는 비전공자들도 누구나 편하게 들을 수 있다. 첫 사진이 아마 마스터클래스 장면 아닌가 싶다.
싼 표는 18파운드, 비싸도 대개 60파운드를 넘지 않는다. 연회비 60파운드를 내고 '위그모어홀의 친구들'로 가입을 하면 비회원보다 먼저 공연을 예매할 수 있게 해준다.
위그모어홀은 특히 일요아침콘서트가 유명하다. 위그모어홀은 이렇게 설명한다. The perfect way to start your Sunday: an hour of world-class classical music followed by a cup of coffee or a glass of sherry.
연주를 들은 후엔 로어 그라운드로 내려가서 무료로 제공되는 커피나 차, 와인 한 잔으로 여운을 즐길 수 있다. 어린이들을 위해 각종 주스와 우유도 준비된다. 입장료는 18파운드.
우리 가족이 갔던 공연 중에는 클라라 주미 강과 김선욱의 연주가 이 형태였다. 나는 그 일요일 한낮에 셰리주*를 석 잔쯤 마시고 적당히 흥이 올랐다.
정겨운 영국 할머니가 연주에 대한 찬사와 함께 자기가 일본에 갔던 경험을 한참 들려줬던 기억이 있다. 한국인에게 일본 이야기를 하는 건 의아했지만(그래서인지 옆에 선 할아버지는 말 없이 할머니 소매를 잡아 끌었다) 모든 게 용서 되는, 그야말로 일요일을 시작하기에 가장 완벽한 일정이었다.
그밖에도 카도간홀과 사우스뱅크센터 등 좋은 공연장이 즐비하다. 글이 길어지는 것 같으니 다음 편에 계속하기로 하자.
*셰리주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주로 생산되는 강화 와인. 시판되는 셰리는 주로 화이트와인을 숙성시키는 과정에 증류주를 더해서 숙성시켜 얻는다. 식전주 또는 디저트로 제공된다. 일반적으로 알코올 함량 15%에서 22% 수준이니까 소주와 비슷하다. sweet sherry의 경우 포도주니까 향긋한데 맛은 달아서 어릴적 먹었던 감기약 시럽과 비슷한 느낌이다. 칼로리가 레드 와인의 두 배 수준이라고 한다. 물론 드라이 셰리도 적지 않다고 하니 전문가의 추천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
the voice of Jupiter’‘the voice of Jupiter그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