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거창하지 않은 것을 위한

by 한대경 Dae Gyeong Han




1. 이제 막 겨울이 지나갔다. 겨우내 길고 긴 찬 바람과 눈발을 버텼던 나무들은 초록으로 물이 들기 시작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꽃들은 성실하게 피어났다. 왜인지 나만 불성실하게 주어진 삶을 흘려보낸다고 느끼는 까닭에 나도 물들고 어떻게든 하루를 피우고자 생각했다.


2. 마음속에 생각이 많았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듣고, 배우고 목격한 정보가 넘치지만 잠정적인 형태로 규합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산된 정보는 어떤 목적의식을 함양하기 어렵고, 이에 해답에 대한 갈망과 용기의 결여로 나타난다. 예컨대 추구하고 본받고 따르고 싶은 고결한 가치와 경험이 있지만, 내 마음속에는 어떤 점 조직에 불과하여 따르기 어렵다던가 하는 일이 말이다.


3. 얼마 전 회사에 휴가를 내고 최재천 교수의 강연을 다녀왔다. 내 평생 응모 후 추첨이 된 일도 매우 드물었지만, 평소 그가쓴 책을 읽고 행적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꽤 소중한 기회였다. "양심, 공감, 숙론"이라는 주제의 2시간 남짓의 성찰과 자기 각성의 강연이었다. 은퇴는 벌써 했지만 대학의 강의는 계속하고 있는, 그래서 노교수인 그는 전혀 늙지 않은 기세로 하나씩주제를 풀었다. 생물학을 전공했으며, 찰스다윈을 추종하는 진화생물학자이기도 하고 복잡계 사회생물학을 중심으로 강의와 강연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강연은 마치 자서전처럼 흘러갔는데, 자신이 동물학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부터 유학생활과 보고 배운 것들을 토대로 사회적 활동(대한민국 호주제 폐지, 돌고래 방사, 4대 강 사업 반대 등)에 참여했던 내용들을 사례로 언급하며 점진적으로 주제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때마다 이 노교수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고 평소에도 꽤 소극적인 사람이기에 정의감에 사로잡혀 사회적, 도덕적 개혁을 지향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잘 먹고, 잘 살고 적당히 존경받는 위치에서 삶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을 수 있는 큰 이유 중에 하나로 “염치(廉恥)"를 언급했다. 염치란 '체면을 차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하는데, 그 노교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무리 문명을 이루고 기술을 발달시켜 고등생물로서 자의적인 지위를 갖고 있어도 자연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존재인지, 인간의 삶과 죽음 얼마나 이 거대한 생태 속에 작은 점 하나 밖에 되지 않는지를 역설했다. 그의 염치 덕분에 이 강연을 듣게 된 것이다.


4. 다시 돌아와, 나의 마음속에 점 조직은 마치 밤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찍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밤하늘의 별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할 수 있지만 천문학에서 별은 스스로 에너지를 복사하여 빛을 내는 천체로 규정하는데, 태양을 제외하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4광년 이상이 소요되며, 이는 현재 인류가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시 말해, 내 마음속 수많은 점 조직들은 손 닿을 수 없는 어딘가 심연의 자리에 있고, 나는 멀리 떨어져 흩어진 마음을 조합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


5. 어릴 적 꿈은 꽤 여러 가지였다. 축구를 좋아했고 골문을 지키는 사람이 멋있어서 골키퍼가 되고 싶었다. 또 하나는 우주의 관한 책을 보고, 우리나라 최초 무궁화 1호 발사를 감격스럽게 지켜보며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는 집안의 영향인지 목사님이 되고 싶기도 했다. 각설하고, 지금은 어릴 적부터 흩어져 있던 나의 점 조직 하나 별 하나를 잘 모으고 간수하는 일,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것에 용기를 내는 일, 세상의 식과 법을 지키고 따르느라 피곤해도 잊지 않고 내 마음을 잘 헤아리는 일, 그저 무명해도 작은 염치하나 붙잡고 사는 일을 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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