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과 재편은 다르다. 단절은 국제 규범이 무너져 국제사회가 무정부 상태로 전락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는 제도의 파괴라기보다 새로운 질서의 재편에 가깝다. WTO·IMF·UN 같은 국제기구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으며, 미국과 중국 역시 145%에 달하는 살인적 수준의 상호관세 전쟁 끝에 결국 협상을 택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트럼프 행정부가 내세운 ‘상호관세’ 개념이다. 이는 자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한 국가에 동일하거나 더 높은 수준의 보복 관세를 매기는 방식으로, 무역 규범 자체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동시에 미국은 기존의 세계경찰을 자처핟ㄴ ‘팍스 아메리카나’ 모델을 대신해, 안보 제공의 비용을 동맹국에게 전가하는 ‘글로벌 투캅스 모델’을 병행했다. 즉, 군사적 의무와 경제적 부담을 동맹국과 함께 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질서를 설계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국제사회는 제국주의와 보호무역이 난무하는 ‘주먹의 질서’ 속에 있었고, 그 결과 대공황과 두 차례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을 맞이했다. 전후 미국은 이를 반성하며 UN·GATT·WTO·IMF 등 국제 제도를 구축하고, 동맹국에 안보와 경제 지원을 제공해 고도성장을 이끌어냈다. 이는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이 전제된 모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은 국가부채 36조 달러, 연간 1,30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이자 부담에 시달리고 있으며, 제조업 경쟁력마저 약화되었다. 과거처럼 ‘안보 제공과 성장 기회’라는 공식은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게 되었고,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안보 제공의 대가로 비용 전가’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자유주의적 규범은 점차 힘의 논리로 대체되는 구조적 변화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안보 제공을 지렛대로 삼아 동맹국에 경제적 부담을 압박했다. 한국의 경우 방위비 분담금 5배 인상 요구를 받았는데, 전시작전통제권이 여전히 미군에 있는 상황에서 안보 자율성이 제한되어 있어 협상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이 경제 조건으로까지 연결되면서, 전통적으로 안보 보장을 교환 조건으로 유지되던 한·미 동맹 구조는 점차 산업 종속적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은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한국산 철강에 25%, 알루미늄에 10%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나아가 반도체·배터리 등 전략 산업 분야에서는 ‘CHIPS법’을 통해 미국 내 공장 건설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보조금 배제와 추가 관세 부과 등 불이익이 뒤따랐다. 미국은 세계 최대 소비시장과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맹국의 저항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으며, 그 결과 협상력의 비대칭 구조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전환 속에서 한국은 자율성과 다변화를 통해 협상력을 확보해야 한다. 전시작전권 환수와 자주적 방위 역량 강화는 미국 의존도를 완화하는 안전판이 된다. 동시에 미·중 경쟁 구도에만 매이지 않고 EU·아세안·인도 등과 전략 협력을 확장해야 한다. 산업 측면에서는 반도체·배터리에 국한되지 않고 AI·바이오·재생에너지 등 미래 산업에서 독자적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선택이 아니라 국제 협상에서 자율성을 확보하는 조건이다. 트럼프 2기의 보호무역주의는 한국의 안보 의존을 경제적 족쇄로 전환하고 있으며, 능동적 선택을 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질서 속에서 종속적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체적 대응을 한다면, 한국은 오히려 다극화 질서 속에서 협상력을 확대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