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춘

10년치 회고 #20-2

by 아르베

​이태리에 도착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잔뜩 움츠러들었던 내 어깨에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거창한 적응의 결과는 아니었다. 그저 매일 마주하는 사소한 일상들이 나에게 조금씩 말을 걸어온 덕분이었다.


​당시 나는 한 가정집에 머물며 그곳의 식구인 개 '스텔라'와 매일 데이트를 즐겼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주인을 대신해 줄을 잡으면, 산책의 주도권은 온전히 스텔라에게 넘어갔다. 나는 길을 아는 주인이 아니라, 그저 스텔라가 궁금해하는 냄새를 따라가는 다정한 조력자였다. 스텔라의 발걸음을 무작정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미로 같던 동네 길들이 내 손바닥처럼 익숙해졌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 코끝을 스치던 시원한 저녁 바람과 스텔라의 경쾌한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스텔라와 함께 경험한 이태리의 매력중 하나는 공원이었다. 어학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약속이라도 한 듯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이태리에서 공원은 대단한 마음을 먹고 찾아가는 곳이 아니었다. 걷다 보면 발길에 닿는 곳이 초록이었고, 우리는 그저 피곤이 몰려올 때 그 푸른 공원에 몸을 뉘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하고 푸른 하늘을 보고 있으면 복잡했던 고민들이 잔디 사이로 흩어졌다. 간혹 코끝을 찌르는 대마초 냄새가 묘한 현실감을 일깨우며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이태리라는 풍경의 일부로 받아들일 만큼 내 마음은 넉넉해지고 있었다.


​걷고 쉬다 보면 자연스레 허기가 찾아왔고, 그 허기는 나를 시험대에 올렸다. 어학원 왼쪽 길 끝자락에 있던 작은 식당. 점심때마다 코를 찌르는 고소한 냄새의 주인공인 '빠니노'를 주문하는 일은 매번 치열한 전투였다.


​"이거 하나 주세요. 아니, 이 빵으로요."


​내가 아는 모든 단어를 동원해 고군분투했지만, 수많은 재료 앞에서 주인과의 대화는 자꾸만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소통의 한계에 부딪힌 나는 뭔지도 모른 채 그저 웃으며 "맞아, 맞아(Si, Si!)"를 연발했다.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완성된 빠니노. 하지만 그 첫 입은 너무나 완벽했다. 그곳이 숨겨진 맛집이었을까, 아니면 이방인의 서툰 용기가 양념이 된 탓일까. 정체 모를 그 빠니노의 맛은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한 맛의 이정표로 남아있다.


​돌이켜보면 이태리에서의 진짜 즐거움은 모든 것을 완벽히 통제하려던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찾아왔다. 개에게 길을 맡기고, 아무 데나 누워 하늘을 보고, 무슨 재료인지도 모르는 샌드위치를 기쁘게 받아 든 순간들. 그 서툴고 모호한 틈 사이로 이태리의 진짜 아름다움이 스며들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혹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획하고 이해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길을 몰라 헤매더라도, 그저 "맞아, 맞아"라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보길 바란다. 당신의 계획에는 없던 완벽한 인생의 맛이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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