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네프와 시테섬 끝 수양버들
파리 시내를 오가다 보면 센강과 그 위의 다리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센강은 계절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깔과 표정을 달리하며 다가오고, 그때마다 마음에는 서로 다른 감흥이 일어난다.
파리 센강에는 서른일곱 개의 다리가 있다. 그중 내가 처음 알게 된 다리는 청소년 시절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속에서 만난 미라보 다리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두 번째로 마음에 남은 이름은 퐁뇌프(Pont Neuf)였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영화 《퐁뇌프의 연인들》을 통해서였다.
센강은 파리 중심부에서 두 개의 자연섬인 생루이섬(Île Saint-Louis)과 시테섬(Île de la Cité)을 차례로 만나며 흐름을 나눈다. 그 강물은 시테섬 서쪽 끝 하류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져 흐른다. 파리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시테섬의 동편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 끝자락에는 퐁뇌프가 놓여있다.
센강을 가로지르는 퐁뇌프는 이름 그대로 '새로운 다리'다. 17세기 초 프랑스 앙리 4세(Henri IV) 때 완공된 이 다리는 다리 위에 집과 상점이 빼곡하던 중세의 관습을 벗어나, 건물 없는 넓은 보행 공간을 처음으로 열어젖혔다. 도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에서 새롭게 만든 교량, 그래서 단순하게 '새로운 다리'라고 불렸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 다리는 센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시테섬을 사이에 두고 강의 좌안과 우안을 이어준다. '새로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장 오래된 다리, 퐁뇌프. 시간은 늘 그렇게 역설로 남는다. 새로움은 결국 옛것이 되고, 옛것은 또 다른 새로움의 기준이 된다.
퐁뇌프 중간쯤, 시테섬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완공 당시의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기마상이 오롯이 서 있다. 이 동상 뒤편의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시테섬 서편 끝자락의 작은 공원에 닿는다. 강 하류를 향해 뾰족한 뱃머리처럼 나아간 삼각형 공간, '베르갈랑 공원'(Square du Vert-Galant)이다. '베르갈랑'은 '늙어서도 정열을 잃지 않은 왕'이라는 앙리 4세의 별명에서 유래했다. 사람은 사라지고, 별명은 지명이 된다. 이것 또한 시간의 방식이다.
베르갈랑 공원을 지나 시테섬 서쪽 맨 끝자락에 이르면, 센강과 맞닿은 섬 끝에 우는 버드나무(saule pleureur), 수양버들이 서 있어 이곳의 운치를 더해준다. '우는 버드나무'는 수양버들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를 옮긴 말로 실제로 우는 것이 아니라,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강물 위로 가지를 늘어뜨린 모습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 비좁은 공간은 젊은이들의 조용한 낭만의 장소가 되어 있다. 그 가지는 울음이 아니라, 연인과 친구들이 이곳에 앉아 남기고 간 고요에 가깝다. 강물 위로 흘러내리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침묵이다. 물기 어린 땅에 뿌리를 두고 자라는 수양버들처럼, 사람도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틔운다.
도심의 센강 석축 제방을 따라 걷다 보면, 짙은 녹색 철제 상자들이 돌난간에 고정된 채 길게 늘어선 풍경과 마주한다. 사람들은 이를 강변의 노천서점이나 노천헌책방이라고 부르는데, 프랑스어로는 '센강의 부키니스트'(Les Bouquinistes de la Seine)라고 한다. 고서적과 헌책, 판화와 그림, 엽서, 빈티지 잡지와 오래된 포스터까지, 부키니스트는 강변 난간 위에서 시간을 펼쳐 놓는다. 길이 2미터 남짓의 상자들이 양쪽 강변을 따라 약 3킬로미터에 걸쳐 늘어서 있어, 단순한 가판대가 아니라 세월을 담는 작은 서랍처럼 보인다.
줄지어 선 녹색 상자와 그 공간을 이루는 부키니스트는 헌책 노점상이자, 강변의 풍경을 이루는 하나의 방식이다. 센강과 그 주변 경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만, 부키니스트 자체는 프랑스의 국가 무형문화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가 등재한 것은 노점상이나 가판대가 아니라, 17세기 이래 이어져 내려온 부키니스트의 시간과 전통이다. 퐁뇌프가 돌로 남아 있는 다리라면, 부키니스트는 사람의 손을 통해 이어지는 시간이다. 왕은 사라졌지만 '베르갈랑'이라는 이름은 남았듯, 형태가 아니라 의미가 더 오래 남는다.
현재는 양면을 가진다. 한쪽은 과거, 다른 한쪽은 미래. 우리는 언제나 시간의 다리 위, 그 중간에 어딘가에 서 있다. 뒤로 돌아갈 수는 없고, 앞으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른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물 수는 없다. 아직은 선택할 수 있지만, 결국 우리는 한 걸음을 내디디게 된다.
그 좁은 다리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로 존재한다. 뒤섞인 시간의 물결 속에서 유일하게 만질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유형은 시간 속에서 닳아 사라지지만, 무형은 시간을 통해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 또한 누군가의 선택이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결국 남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태도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을 이어가고 있는가.
퐁뇌프 아래, 시테섬 끝 수양버들 그늘에 앉아 있으면 흐르는 강물 위로 겹겹의 상념이 차오른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지금'이며, 그 '지금'은 곧 오래된 순간이 된다.
시간은 닫혀 있지 않다. 오히려 열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건너느냐이다. 새로움은 낡아가고, 낡음은 다시 새로워진다.
우리는 결국 선택하게 된다. 다리를 건널 것인지, 난간에 기대어 머물 것인지.
어쩌면 우리는, 이미 건너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