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어디에 남는가, 청년 헤밍웨이의 어느 하루 동선
광장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지나쳤다가 다시 마주치는 분기점이다. 늘 사람이 모이지만, 누구도 붙잡지 않는다.
머무르기보다는 다시 걷게 만드는 장소다. 그런 사람들 사이로 시간도 함께 지나간다. 그래서 광장은 언제나 과거로 향하는 시간의 갈림길이 된다.
20대 초반의 젊은 헤밍웨이와 가장 밀접했을 광장은 파리 5구의 무프타르 길(Rue Mouffetard) 초입에 자리한 아담한 꽁트르스카르프 광장(Place de la Contrescarpe)이다. 소박한 분수를 가운데 둔 이 작은 광장 주변은 늘 주민과 여행객으로 북적인다.
특히 헤밍웨이가 살았던 아파트 건물이 이 광장과 아주 가까운 곳에 남아 있어 여행객들은 지금도 심심찮게 그 주소지를 찾아보곤, 광장의 분수 곁에서 발걸음을 늦춘다. 광장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가 매일 오고 갔을 동선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그래서 이곳은 지금도 한 세기 전을 살아가던 한 젊은이의 하루가 스쳤을 법한 흔적을 더듬게 만든다.
나는 이 광장의 한 브라스리(brasserie) 테라스에 앉아 있다. 지금의 파리에서, 나는 그가 오갔을 이 광장을 넌지시 다시 바라본다.
그가 거의 매일 한 번쯤은 스쳤을 이 분기점에서, 기억은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기억은 향했던 길, 그가 선택했던 방향을 따라 되살아난다.
청년 헤밍웨이의 하루는 까르디날 르무완 길(Rue du Cardinal Lemoine) 74번지에서 시작된다. 그는 부인 해들리(Hadley)와 결혼한 지 삼 개월 남짓 지난 1921년 12월 하순의 어느 겨울날, 파리에 처음 도착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신혼생활을 이제 타국의 추위 속에서 이어가고 있었다. 이때는 가난과 낯섦 때문에 더욱 추웠을지도 모를 시작의 계절이지만, 사랑과 희망 그리고 소설가가 되겠다는 열정으로 더없이 행복한 시기다. 그는 이곳에서 1922년 1월부터 첫아들 범비(Bumby)가 태어나기 전인 1923년 8월까지 머물며, 재능을 키워가는 배움의 시간을 보낸다.
집을 나선 그는 아파트 건물의 현관문을 뒤로 닫고,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돌아 길을 따라 꽁트르스카르프 광장 쪽으로 걷는다. 이 길 끝에서 맞닿아 펼쳐지는 광장은 멀지 않다. 오히려 가깝다. 그래서 늘 지나치게 되는 거리다. 소박하지만 생동감 있는 동네 광장, 그에겐 목적지가 아니라 이 시기 일상생활의 중심에 놓인 공간이다.
분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원형의 광장은 크지 않지만, 네 개의 길과 맞닿으며 다섯 갈래로 열려 있다. 이 동네의 먹거리 골목인 오래된 무프타르 길이 광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지나가며, 하나의 방향을 더 보태 다섯 갈래로 흩어진다.
나는 지금 광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라 꽁트르스카르프'(La Contrescarpe)의 테라스에 앉아, 저쪽 길에서 걸어오는 건장한 체구의 그를 눈으로 좇고 있다. 그에게는 망설임이 없다. 이 길은 그의 하루에 이미 익숙한 반경이다. 광장과 맞물린 그 길 끝에 이르자, 그는 멈추지 않고 곧바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한 카페 앞을 스쳐 지난다.
이제 나는 광장 맞은편의 '카페 델마'(Café Delmas)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는 내 시야 안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 카페 앞을 가로질러 걷고 있다. 오늘날의 델마는 밝고 관광객이 많으며, 유쾌한 분위기의 카페다. 하지만 그곳은 훗날 그가 좋지 않게 묘사했던 '카페 데 자마퇴르'(Café des Amateurs)가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당시의 그에게서는 그 자리를 피하려는 기색이 드러난다. 불쾌한 소음을 확인하듯 잠시 고개를 들었을 뿐, 그는 모퉁이를 우측으로 꺾어 무프타르 길을 따라 자신의 작업실 쪽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무프타르 길 초입 쪽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작은 골목 네거리가 나온다. 그는 곧바로 이어지는 철학자 이름을 딴 데카르트 길(Rue Descartes)로 접어든다. 저만치 염소 떼를 몰고 가는 풍경을 앞에 두고, 이내 39번지 건물로 불쑥 들어간다. 당시 이곳은 가난한 학생과 예술가들이 장기로도 머물 수 있던 저렴한 소규모 호텔이었다. 그는 방 하나를 빌려 놓은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다. 숙박이 아니라 작업실이다.
이 건물은 이미 한 번의 문학적 끝을 겪은 장소였다.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Paul Verlaine)이 가난과 병 속에서 1896년 생을 마감한 곳으로, 헤밍웨이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이 건물에 시인을 기리는 '라 메종 드 베를렌'(La Maison de Verlaine)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베를렌이 죽었던 장소에서, 그는 꼭대기 층의 방 하나를 빌려 글을 쓴다. 한 세대의 시인이 끝난 자리에서 다음 세대의 작가가 문장을 쓰며 자신을 단련한다. 그래서 이 꼭대기 방에서의 글쓰기는 늘 조금 더 엄격해진다. 때로는 죽은 시인의 시간이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듯, 그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문장을 다듬는다. 이 방은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진솔한 문장과 간결한 문학적 스타일이 시작된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글이 잘 써지는 날에는 계단을 내려오며 좋아진 기분에 가슴이 은근히 차오른다. 그러나 글쓰기가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럴 때 그는 다음에 이어질 첫 문장만 꺼내어 놓고, 조용히 작업을 멈춘다.
그는 팡테옹 광장 뒤편에 인접해 있는 오래된 생테티엔느뒤몽 성당(Eglise Saint-Etienne-du-Mont)을 향해 걷는다.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겹쳐진 이 성당은 조용하면서도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장소다. 그에게 이곳은 신앙의 공간이라기보다, 침묵 속에서 내적 질서를 가다듬는 정신적 피난처다. 돌의 구조와 고요함은 문장의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 훗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가 이 주변을 '시간의 문'처럼 사용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 길은 언제나 말보다 먼저 절제를 가르친다.
성당을 지나 그의 동선은 건너편에 자리한 프랑스의 오래된 명문 교육기관인 앙리 4세 고등학교(Lycée Henri IV)와 팡테옹 광장 앞을 지나 생미셸 큰길로 이어진다. 큰길을 건넌 그는 즐겨 산책하는 뤽상부르 공원(Jardin du Luxembourg)으로 들어서고, 으레 뤽상부르 미술관(Musée du Luxembourg)도 찾는다. 비록 지금은 그림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그는 거의 매일 당시 그곳에 있던 마네와 모네, 세잔을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세심히 바라본다.
특히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Paul Cézanne)의 그림 앞에서, 그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느끼고 배운다. 화폭 속 구조와 절제된 시선은, 그가 바라는 깊이 있는 글쓰기에 무엇이 부족한지를 묵묵히 드러낸다. 그에게 뤽상부르 공원과 미술관은 아내에게 점심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며 나오기에도 가장 편한 곳이다. 그의 배가 비어 있을수록 세잔의 그림은 한층 또렷해지고, 더 고플수록 그 이해는 깊어진다.
뤽상부르 공원을 서쪽으로 몇 걸음 벗어나면 닿는 플뢰뤼스 길(Rue de Fleurus) 27번지. 당시 파리에서 젊은 미국 작가들을 후원하던 미국인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의 집에 그가 들른다. 그녀의 아파트는 예술가들이 드나들며 교류하던 공간으로 예술과 문학의 살롱(Salon)이었고, 그에게는 아무 때나 들러도 괜찮다고 했다. 그는 어느 날 그곳에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 길 잃은 세대)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된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한 자동차 정비소에 들렀다가, 프랑스인 정비소 주인이 젊은 정비공 청년에게 '자네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Génération perdue)라며 심하게 나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 일화를 전하며, 헤밍웨이를 비롯한 당시의 미국 젊은이들 모두를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렀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판단에 가까웠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그렇게 규정하는 방식에, 그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말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문학의 자리로 옮긴다.
훗날 그는 자신의 첫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1926)의 첫 페이지에 '잃어버린 세대'라는 이 말을 성경 전도서 1장의 몇 구절과 나란히 올려놓는다. 소설 본문에 앞서 배치된 서두 인용문인 에피그래프(epigraph)를 통해, 그는 일회적 비판에 불과했던 말을 하나의 세대 이름으로 고정시킨다.
이때부터 '잃어버린 세대'는 비난의 말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이름이 되었다. 길을 잃은 세대가 아니라, 기존의 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를 가장 먼저 살아내야 했던 세대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무프타르 길과 직각으로 만나는 블랭빌르 길(Rue Blainville)을 따라 내려와 분수 쪽으로 걸어온다. 시간이 제법 지나, 다른 길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돌아오는 즈음이다. 그의 허기는 어느 정도 가라앉고, 다른 감각들도 천천히 되살아난다. 그가 조금 전 그냥 지나쳤을 블랭빌르 길 6번지가, 내 머릿속에서는 오래된 기억으로 스친다. 그곳에는 한때 내가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 가끔 찾던 한국 식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이름의 한국 식당 간판으로 바뀌어 걸려 있다.
도시는 그렇게 바뀐다. 장소는 남고, 표지는 바뀐다. 기억은 그사이에 숨어 있다.
그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 아내 해들리에게, 파리에서 지내며 겪게 될 고약한 날씨를 비켜나기 위해 세운 여행 계획을 이야기할 작정이다. 아내만 괜찮다면, 언제든 떠날 것이다. 이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어렵긴 해도 모든 일은 결국 잘 풀려나갈 것이라 여긴다. 오늘은 아내와 근사한 식당에 가서, 백포도주를 곁들여 맛있는 음식을 나눌 생각이다.
이 시절의 그에게는 배고픔을 충분히 달래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기진 감각이 늘 따라붙는다. 오래된 도시 파리는 그에게 아직 낯선 장소이고, 배워야 할 시간이며, 알아가야 할 것이 많은 공간이다. 그는 다시 꽁트르스카르프 광장에서부터 까르디날 르무완 길로 접어든다. 집에 가서 아내 해들리를 볼 생각으로.
헤밍웨이 그는 파리에 약 6년 남짓 머물렀다. 캐나다의 한 신문사 특파원으로 일했지만, 생활은 늘 빠듯했다. 특히 파리 체류 초반 몇 해 동안 그는 문학에의 열정과 꿈을 가꾸며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져갔다. 이 시절의 파리 시절을 회상한 그의 유고 회고록은 이 도시를 떠난 지 30년 가까이 지난 뒤에 쓰였다. 그만큼 긴 시간의 간극 속에서, 상실을 전제로 한 파리의 기억은 한 번 더 걸러지고 정제된다. 그에게 파리는 그대로 보존된 장소라기보다, 작가가 되어가던 순간들만을 남기며 다시 조립된 도시였다.
지나간 시간의 파리는 배경이 되고, 이야기 속의 파리는 내면의 상태가 된다. 실제의 파리는 '그 시절의 도시'였고, 글 속의 파리는 '그때의 나'였다.
파리를 떠난 훗날, 헤밍웨이는 파리를 '움직이는 향연'(moveable feast)에 비유하며, 기자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If you are lucky enough to have lived in Paris as a young man, then wherever you go for the rest of your life, it stays with you, for Paris is a moveable feast.”
(젊은 날 파리에서 살아본 행운이 있다면, 그 이후 평생 어디를 가든 파리는 당신 곁에 깃들어 남아 있다. 파리는 살아 움직이는 향연이기 때문이다.)
파리는 중심이 아니라 분기점이었다. 도착지가 아니라, 다시 걷게 만드는 장소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사라졌을 길을 눈에 담는다. 꽁트르스카르프 광장을 뒤로한 채, 광장에서 흩어져 나가는 한 갈래인 라세페드 길(Rue Lacépède)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