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넬리몰리 Jul 06. 2021

번아웃을 극복한 나의 방법: 도망

소리 없이 다가오는 직장인 헌터

 정체의 징조, 하루살이


 한창 업무가 쌓여 바쁘던 때엔 '한가해지면 이런  저런  해야지'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순간순간을 버티기 위한 쾌락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늦은 시각 퇴근하고 귀가하면  기다리고 있는 택배 박스라던가 또는 맥주   같은 것들. 장기적인 희망사항은 사실 머리에 들어오지조차 않고 보상으로서 인지하기도 어려웠다. 짧게는 ' 회의가 끝나면 나가서 커피  잔을  와야지'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 제안서만 넘기면' 혹은 ' 미팅만 넘기면' 같은 생각들.


  직장에 다니면서 자기 계발을 한다는 것, 혹은 진로 고민을 한다는 건 그만큼 한계가 크다. 그건 내가 약 1년간 무의식 중에 휘둘러온 방패이기도 했다. "고민을 아직 덜 했어." 그간 내가 가장 많이 말해온 변명일 터다. 지금 나의 역량도 체력도 한계라는 것도 알지만 나는 사무실을 떠나기를 주저했다. 그런 내게 파트너는 누누이 말하곤 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다른 직종에 대한 고민도 그 무엇도 하기 어렵다고. 어쩌면, 지금 이 환경을 벗어나 여유를 가지면서 더 멀리까지 고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나의 경우엔 조금 특이했다. 기나긴 번아웃 기간을 어렵사리 통과했지만 체력도 정신력도 모두 돌아오지 못한 애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버틸 지경은 아니니 이게 정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버티자면  버텨지고, 그렇다고 상황이 만족스럽진 않다는  사실 평범한 직장생활의 단면이니까. 나는 근근이 이어지는 짧은 보상과 동료들 간의 소통 속에서 회사 생활의 즐거움을 충당하며 버틸  있었다.


 헌데  즐거움과 성취감의 근원이 하루살이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지겹도록 되풀이되던 정체구간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게  것이다. 정체를 인지하게 되는 계기는 거의 이렇다. 하루살이를 자각하는 . 처음 시작할 때에 보고 있었던  경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이상 즐겁지 않다는 .



 야근이 번아웃은 아니에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기업에 근무하며 선택 시간 근무를 누리는 친구들이 번아웃을 토로하면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야, 너 잠 몇 시간 자? 그렇게나 자? 번아웃일 수가 없네!" 이런 논리였다. 한데 내가 번아웃을 자각한 이후 큰 깨달음이 뒤통수를 쳤다. 무언가를 초과해서 하고 있다는 것이 번아웃의 단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퇴사한 K 퇴사 당일까지도 본인이 번아웃을 겪고 있는  몰랐다. 단지 모든 일에 조급해지고 자꾸만 초조하다고 했다. 그러다 퇴사  갑자기 한가해지자 드디어 자각이 왔다. K 회사에서 자신의 업무가 지니는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피드백을 해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는 회사.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같은데, 혹시 나의 역량 부족인 걸까? 그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건  스스로를 표현하는 일을 서서히 놓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차피 똑같은 업무, 어차피 똑같은 미래, 걱정되는  자신의 커리어.


  그의 번아웃은 외부에서 내면으로 침투하고  안에서 몸집을 불렸다. 한데 여기서 조금  생각해볼 만한 것이, 애초에 내면에 모든 이유가 있었다면 번아웃을 겪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만약 K 처음부터 회사에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전달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면 외부로부터  어떤 실망감이나 피로를 느끼지 않을 터다. 번아웃을 겪는다는  단순히 자신의 업무와 주어진 환경에 불만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속에서 유의미한 노력을 해봤고 나름대로의 결과를 성취해본 이야말로 마음이 이며 매너리즘에 침잠하게 되는 이다. 정말 실무자 입장에서 봤을  번아웃은 내면의 이유와 외부의 자극이 어설픈 짝짜꿍을 보였을  찾아오는  아닌가 싶다.



 극복에 정도(正道) 없다 : 그래서 나는 도망침ㅋ


  나는 마치 자각몽처럼 번아웃을 인지하고 있었다. 너무 징후가 뚜렷해서, 팀 동료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내게 말해주었을 정도였다. 퇴사 이후에서야 번아웃을 인지한 K와 달리 나는 그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했었다. 전술했듯 나만을 위한 업무 셧다운제를 시행해봤고, 운동을 시작했으며,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살짝 늘려도 봤다.


  결론적으로 나의 극복 방법은 이거였다. 업무 환경으로부터 도망치는 . 딱히 대체할 단어가 없어 '도망'이라고 썼지만,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아니다. 번아웃을 극복하는 방법엔 정도가 없으니까.


 다만 확실한 것은 어쨌든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하니까. 노동을 하고 생계를 유지한다는 기본적인 '' 개념이  안에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해가지 않도록 나는 길잡이를  필요가 있다. 여러 시도를 해봐도 딱히 차도가 없어서 나는 업무 환경과 거리를 두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고, 비관적인 생각들이 희석되고, 일상의 다른 가치들과 뒤섞이며, 다음번 사무실로 입장할 즈음엔 신선한 자극과 새로울 상처에 설레고 있기를 바라면서.


  번아웃을 겪고 있는  또래 직장인들에게 극복 방법은 ' 아니면 ' 아니라 '도개걸윷모'라고 생각하길 권한다.


 선택지가 아주 많지는 않다. 그래도  상황에 적합한 것으로 블렌드해서 길을 고를  있다고 생각하자.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내가  환경에 머물러 있으면서 피로와 고통을 감내하며 극복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아니면  효율을 상회할 정도로  강력한 다른 가치가 있어 당장 이곳을 떠나는 것이  맞는지. 혹은 나처럼 배수의 진을 치고 상사에게  달만 어디 섬에 다녀오겠다고 부딪쳐보거나? 월급 통장을 손에 쥐고서 가늘고  인생을 다시금 다짐한다거나.


  어차피 일할 시간은 길다. 지금 당장 '업'의 모든 것을 다 해내야 하는 건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몸이 보내는 자발적 퇴사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