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헛소리 그만합시다
결혼 5개월 차의 첫날이 밝았다. 합가하고 나니 이제야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자각이 생긴다.
그리고 모든 다른 커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게 그리 달기만 하진 않다.
나는 열혈 직장인이었다. 직장 생활을 한 지 7년 차, 중소기업에서 일하면서 얻는 고뇌와 행복을 모두 누렸다. 그런 가운데 보통의 연애를 했고 다른 많은 요즘 여성들과 비슷하게 비혼이라는 가치관을 서서히 누그러뜨리면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이게 됐다. 어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비혼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평생 같이 해도 안심할 만한 사람이 없다면 굳이 뭐하러 결혼을 해?" 이런 간단한 마인드였다. 그러다가 연애 중 어떤 계기로 인해 가치관이 바뀐 것이다.
바뀌었다고는 해도 초반의 마인드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결혼이라는 것이 순전히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뿐.
평생을 함께 할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아니, 없다기보단 내게 나타날 가능성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도 같아서 '없다'라고 할 수 있다. 그 바늘을 찾은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평생을 살겠지만 보통의 많은 사람들은 불안과 걱정이 함께 존재하는 결혼을 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결혼이라는 제도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 같다. 연애하면서 살짝 흐린 눈으로 넘길 수 있었던 많은 범실과 부족한 점들이, 왜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면 갑자기 문제가 되는가? 그야 연애와 달리 결혼은 철회하는 게 까다로우니까! 축의금도 받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뽀뽀하는 사진도 찍었는데! 취소한다고 하면 쪽팔리니까!
나는 단순하게 내 연인과 사회적으로 공증된 한 쌍이 되어 자유로이 한 집에 살고, 거리낌 없이 해외여행을 다니고, 오랜 기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청혼을 했다. 그와 함께 해서 내가 행복해지는 만큼 불행도 따라온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연인이란 늘 완벽한 인격자가 될 수 없는 법이고, 결혼이란 늘 완벽한 호흡이 될 수 없는 법이니까.
다만 나의 경우는 비혼이라는 마인드가 누그러지는 과정이 조금 특이하기야 했다. 나는 결혼에 대해 거의 1년간 고민했지만, 실제로 결단을 내린 것은 한창 몸도 마음도 아파 많이 연약해진 시기였다. 살면서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한 존재로서의 외로움이 옆구리를 파고든 탓이다. 어차피 곁에 두고 살고 싶은데 그럴 거면 좀 편하게 살면 안 되나? 집도 좀 합치고, 어디 놀러 가면 놀러 간다고 눈치 보지 않고 모두에게 말하고, 아프면 한밤중에 간호도 받고. 뭐, 그렇다고 해서 선택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선택했으니, 똥이든 된장이든 평생에 걸쳐 책임을 진다. 결혼을 선택한다는 건 그만큼 비장한 일이다.
한데 이런 이슈가 생긴다. 결혼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머릿속에 우르르 떠오르는 부수적인 것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다들 '결혼'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먼저 보게 마련이니까.
나를 오래 보아 온 지인들은 묻는다. "너, 근데 결혼하고 나서 뒷감당할 수 있겠어?" 여기에서의 뒷감당이란 '결혼'이라는 개념에 깔려있다고들 생각하는 그 어떤 사회적인 합의를 이행할 준비가 되었냐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 내용에는 명절 때 시댁을 우선하여 동선 짜기, 양가의 가족 행사 챙기기, 시댁의 귀염둥이 되어주기, 배우자와 본가 간의 좋은 다리가 되어주기 등등 수많은 것들이 있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고? 응, 개소리이다. 결혼에 사회적 합의 따위가 어디 있어? 내가 알기로 결혼은 한 쌍의 커플이 사회적으로 하나의 세대, 하나의 단위가 되기 위한 절차다. 그러다 보니 본래 생판 남이었던 두 집안에 관계가 생겨나고 왕왕 인사할 일이 생기는 것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결혼은 여기까지다. 결혼한다고 시댁이 남이 아니게 되나? 여전히 남이다! 다만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관계가 될 뿐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회적으로 쌓이게 된 관행들은 의무가 되어선 안되고, 나의 의지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이 얼마나 옳은 말인가.
그럼에도 나는 지인에게 대답한다. "뭐 하는 데까지 하는 거지." 세대차에 장사 없다. 부모님 세대와 우리 세대에는 시간이라는 간극 외에도 더 큰 격차가 있다. 우리는 성인이 되며 디지털을 핏속에 내재화했지만, 부모님 세대는 그렇지 않다. 그 어떤 논리적이고 민주적인 대화도 이 격차에서는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한다. 때문에 결혼을 선택하면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을 무조건 관철해 나가겠다는 의지도 고집도 버렸다. 가시밭길이 눈앞에 있다면 목적지가 눈앞이더라도 돌아가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니까. 바보같이 "이건 내 신념에 반하는 짓이에요!"를 부르짖으며 지금 불행해지는 것은 사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윗 세대가 당연하단 듯이 요구하는 그 '사회적 합의'에 따른 의무들을, 나는 짊어메야 하는 걸까?
'관철'의 대척점에 '포기'를 둘 것인가, '타협'을 둘 것인가? 나는 배우자, 친정, 시댁에 이르는 거대한 그물망을 상대로 저 세 개의 단어를 두고 저울질한다. 내 의지를 관철하는 것은 어렵고, 포기하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렵다. 당장 눈앞에 놓인 상황을 편하게 넘긴다 하더라도 내 안의 무언가가 꺾이는 기분은 정말이지 구릴 테니까 말이다. 우리 세대의 여성들은 타협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본래 저 대척점에 '타협'을 두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타협 자체를 나쁜 것으로 인지하기 시작하면 스스로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없으니까.
나의 의지를 사회적 의지와 타협한다는 것은 굉장히 불편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비혼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비혼에도 많은 취약점이 있듯이, 결혼을 선택하면 불리하게도 타협이 딸려온다. 위에도 썼듯 이건 선택의 문제다. 비혼을 선택한 자도, 타협을 선택한 자도 그저 그러기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 어떤 것도 '나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인지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많은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중간에 악의와 마주치면 그때그때 피해 가거나 돌파한다. 그게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들어온 나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지하면서 '나'를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만일 내가 결혼에 대해 푸념할 때 주변에서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이미 각오했을 테니 받아들여."라고 말한다면 "개소리하네."라고 답한다. 나는 결혼을 선택한 것이지, 내가 정한 적도 없는 사회적 관행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결혼으로 인해 주어지는 행복과 만족감이 그 부산물이듯, 그로 인한 불행과 푸념도 그 부산물이다. 행복은 삼키고 불행은 뱉는 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나는 타협의 방편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하나하나 부딪혀가고 있다. 이제야 조금씩, 결혼이라는 커다란 호수에서 단 것, 쓴 것을 맛보기 시작했다. 이 호수 언저리에서 비슷한 일로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정답도 없는 배에 올라 표류하고 있다.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으며. 그게 이곳, 한국에서 결혼이라는 것의 속성인 것 같다.
앞으로 이런 생각을 정리해 이곳에 작성할 글이 많아지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