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너머의 아포칼립스는?
이 글은 한국 아포칼립스 장르와 아파트에 관한 글의 2부입니다.
2부이나 1부를 읽지 않고도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었습니다.
1부에서 저는 5가지의 이유를 대며 한국 아포칼립스 장르가 아파트에 왜 집착하는지를 고찰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파트가 단순히 많아서, 로케이션과 제작비 문제, 접근성이 너무나도 좋은 산지, 아파트의 방어가 용이하단 특징 이렇게 4가지도 있었으나 그중에서 가장 독특하다 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 아포칼립스 장르의 사회비판을 하려는 특징이었습니다.
한국 아포칼립스물은 사회비판이란 면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빈부격차, 계급투쟁, 주민들의 베타성, 이웃과의 소통문제, 급격한 경제성장의 후폭풍 등등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집약한 게 아파트라고 1장에서 말했었죠. 또한, 설국열차와 부산행같이 열차에서 벌어지는 아포칼립스물 또한 아파트와 매우 유사하다 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설국열차에서는 열차의 칸을 통해 계급사회를 은유했고 부산행 또한 안전한 앞칸으로 가려는 사투를 그렸기 때문이죠. 또한 연상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성장중심, 남성중심 세대의 자멸이 부산행의 종착역이라고 밝히며 한국사회에서 이념과 착취구조를 상징하는 여러 인물들을 기차에 태웠다고 밝혔습니다.
1장의 내용을 정리하고 보완하자면 한국 아포칼립스 물은 사회비판적 요소를 다룬 좀비 아포칼립스 부산행과 에코 아포칼립스 설국열차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거기에 세월호 참사 및 이태원 참사로 인한 한국 사회의 정부에 대한 불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대표되는 안전불감증의 영향으로 점점 사회비판이란 장르에 고착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착화로 인해 아파트란 공간에 창작자들이 집착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착은 사회비판이 주 소재가 아닌 아포칼립스물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었죠.
이번 장에서는 최근 나온 아포칼립스 영화 대홍수와 전지적 독자 시점 영화판을 분석하고 설국열차 결말에 대한 메타적 해석과 앞으로의 한국 아포칼립스물에서 아파트가 아닌 어느 공간이 등장할 것인지에 대해 제 의견을 말해보려 합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영화): 아파트란 공간에선 탈피했으나 사회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사, '독자'형 주인공을 '사회운동가'형 주인공으로 바꾸다.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전독시 영화판은 웹소설의 전개를 일부 차용한 별개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원작과 내용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원작에서 이순신 장군을 배후성으로 둔(이순신 장군의 가호를 받았다 생각하면 됩니다) 이지혜는 검을 사용하는데 반해 영화에선 이순신 장군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고 총을 쓰는 것으로 바뀌었죠.
또한 주인공 김독자의 성격, 유상아의 분위기 등 여러 부분이 상이합니다. 특히 원작에서 김독자는 자신이 빙의하는 소설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의 결말에 만족하고 소설을 좋아하나 영화에선 소설이 최악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주인공(유중혁) 혼자 살아남는 결말이 너무나도 이기적이라고 느껴서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김독자의 학창 시절 트라우마가 관련되어 있다는 원작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전개를 보여준 게 전독시 영화판의 특징입니다.
영화판 전독시는 원작의 매력을 살리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적자생존을 비판하고 모두가 협력해서 살아남는 공동체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사실 소설 전독시는 장르가 아포칼립스이기도 하나 동시에 이 세계의 진실을 아는 주인공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 나가는 사이다물이자 상태창 및 여러 온라인 게임 요소를 활용한 겜판소(게임 판타지 소설)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화를 보면서 겜판소 및 사이다물이라는 느낌보다는 주인공이 동료들과 함께 재난 상황 속에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전개를 보며 기존에 한국 영화에서 많이 답습되던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에 대한 강조의 연장선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김독자가 멸살법(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의 유중혁 혼자 살아남는 엔딩을 비판하는 초반부를 처음 봤을 때 이 영화가 적자생존에 대한 반기를 들것이란 걸 예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전독시 영화판은 부산행에서 보여주었던 요소들을 많이 답습했습니다. 부산행에서 달리는 열차 안에서 좀비로부터 서로 협력하여 살아남는 걸 강조했듯이 전독시 영화판도 시나리오라는 공간에 갇혀 도깨비(비류)라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서로 협력해서 살아남는 걸 강조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작이 갖고 있던 방송의 후원자 느낌의 성좌라는 재미있는 설정, 시청자 확보 때문에 김독자에게 휘둘리는 스트리머 도깨비 비형 등등 매력적인 요소는 죽어버렸죠.
부산행은 기존의 좀비 아포칼립스 물의 클리셰를 비틀면서 한국형 메시지(공동체 주의, 사회비판 등)를 담았다는 느낌이라면 전독시 영화판은 부산행과 같은 기존 아포칼립스(멸망한 세계에서 생존하는 서사)의 특징을 답습하다가 침몰한 느낌입니다.
결국 전독시 영화판은 부산행을 답습하며 원작이 가진 매력을 살리지 못하고 독자였던 주인공을 사회운동가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내버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대홍수: 사회비판에서는 벗어났으나 여전히 공간을 아파트로 설정하다
이번 예시는 영화판 전독시의 감독이었던 김병우 감독의 또 다른 영화 대홍수입니다. 사실 대홍수는 많은 비판을 받는 영화이나 저에게는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대홍수는 아포칼립스 장르이지만 동시에 다루고 있는 것은 가상현실 및 인공지능의 인격에 대한 내용입니다. 재난과 사회적 메시지가 아닌 SF적 상상력, 인공지능의 딥러닝의 시각화에 집중한 한국 아포칼립스 장르에서는 상당히 독특한 사례란 게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죠.
대홍수는 중간에 아포칼립스에서 인공지능에 관한 SF로 바뀌는 전개가 매끄럽지 못했단 점에서 크나큰 비판을 받긴 합니다. 이동진 평론가도 그와 비슷한 지적을 했었죠.
'착점이 솔깃하지만 장르의 전환을 설득해내지 못한다.' - 이동진
이와 같은 한줄평을 남기며 10점 만점에 5점이라는 다소 아쉬운 점수를 주었습니다. 저는 이 대홍수란 영화에 대해 살짝 다른 접근방식을 취해보려 합니다. 저는 대홍수를 한국 아포칼립스, 그중에서도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시도된 아포칼립스 장르에서는 상당히 새로운 시도를 한 영화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한국 아포칼립스 장르가 아파트란 공간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기도 합니다.
대홍수는 재난과 지구멸망적 상황에서의 생존보다 인공지능의 인격을 만들기 위한 딥러닝 과정과 영화의 주인공(구안나)의 아들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 및 해소과정을 중점으로 다룬 영화이죠. 이 영화에서 사회비판적 요소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빈 집을 약탈하는 불량배들을 통해 지구 멸망이라는 재앙 앞에서 잔혹한 본성을 드러내는 인간성에 대한 내용이 나오죠. 물론 그마저도 영화의 중심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홍수의 공간적 배경은 여전히 아파트입니다. 저는 주배경을 여전히 아파트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영화가 홍수로부터 생존을 위한 사투, 인간 및 사회 비판, 사회문제 등을 다룬 한국형 아포칼립스일 거라고 관객들이 오해했다 생각합니다. 그럴만한 게 콘크리트 유토피아, 살아있다처럼 사회를 비판하거나 사회적 문제를 다룬 아포칼립스 장르들이 모두 아파트를 배경으로 해왔으니 관객들이 오해할만하죠.
넷플릭스의 홍보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제 생각으론 영화 예고편에 새인류라는 단어, 일반 블록버스터보다 SF임을 더 강조했다는 점 때문에 홍보방식이 크게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홍수는 저에게 있어 재밌고 흥미로운 영화였음은 확실하나 완성도가 높은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우선 재난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SF로 장르가 전환될 때 부자연스럽단 느낌이 강했습니다. 또한, 지구가 물에 잠기는 상황에서 바다에 어류가 살아 헤엄치거나(담수와 해수가 섞이기 때문에 어류는 다 죽는 게 맞습니다.) 물에 빠진 주인공이 헤일에 휩쓸리지도 않고 살아서 아파트까지 헤엄쳐오거나 하는 사소한 오류들은 영화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고 개연성 및 핍진성을 파괴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SF적 요소에 대한 관심이 다른 관객들보다 많기 때문에 후반부 나온 인공지능, 딥러닝 요소들 때문에 영화를 비교적 괜찮게 평가하나 SF에 관심이 없는 평범한 관객들은 여러 오류들과 갑자기 전환되는 장르, 그리고 아파트란 공간임에도 기존 아포칼립스 장르와 완전 다른 전개 때문에 대부분 영화를 혹평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정리하자면, 대홍수는 한국 아포칼립스 장르의 물리적 배경인 아파트는 그대로 유지하되 그 안의 주요 소프트웨어인 사회비판은 SF적 상상력으로 교체하려 했던 과감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아파트란 하드웨어에 사회비판 대신 SF적 상상력이란 소프트웨어를 장착하는 건 이미 쌓아온 익숙한 문법을 벗어나는 시도였죠. 거기에 영화가 보여준 갑작스러운 장르 변경과 여러 핍진성, 개연성 결여까지 더해지며 관객들은 이 영화를 외면했습니다. 공간의 관성(아파트 고집)과 장르의 도약(SF적 상상력) 사이에서 발생한 이 사고는 한국 아포칼립스 장르가 아파트라는 안락한 공간에서 벗어나야 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설국 열차 엔딩에 대한 메타적 시선 : 아파트(사회비판)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아포칼립스 장르가 아파트란 하드웨어 그리고, 사회비판이란 소프트웨어에 사로잡혀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쯤에서 이 글을 쓰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한 설국열차 엔딩에 대한 메타적 해석을 공유하려 합니다.
설국열차의 마지막은 단순히 한 편의 영화적 결말이라기보다는, 한국 아포칼립스 서사가 반복해 온 하나의 공간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도 보였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설국열차의 열차는 수평으로 늘어놓은 아파트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칸마다 명확히 구분된 계급, 이동의 통제, 내부 규칙의 절대성 그리고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배제와 폭력까지요. 이 열차는 단지 이동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사회 구조이자 한국 아포칼립스가 반복적으로 가두어 왔던 콘크리트 공간의 또 다른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에서 열차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는 선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이를 기존의 사회 구조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에서 벗어나려는 상상으로 읽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파트라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된 위계, 배타성, 생존 논리 자체를 전제하지 않는 아포칼립스를 향한 일종의 탈출 선언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아포칼립스 서사가 오랫동안 아파트와 유사한 공간 안에서만 전개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설국열차의 엔딩은 그 구조 자체를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상상 혹은 이제는 그런 상상이 필요하다는 질문을 던지는 장면으로 읽힐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국열차는 아파트 아포칼립스가 유행하기 전에 나온 영화이나 이후 한국 아포칼립스가 갇히게 될 구조를 미리 탈출한 상상이란 거죠.(이렇게 보니 너무 과대해석 같기도 하네요. ㅋㅋㅋ)
그리고 이런 탈출은 영화가 아닌 웹툰, 웹소설에서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생각합니다. 대표적으로 웹툰 하우스 키퍼는 아파트가 아닌 전 세계를 무대로 삼은 좀비 아포칼립스물이고 사회비판보다는 ai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었죠. 또한 에코 아포칼립스로 분류되는 웹툰 조의 영역도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파트는 얼마 되지 않고 주제 또한 사회비판도 있으나 어류가 인간을 공격한다는 장르적 재미와 생태계의 지위 역전에 초점을 맞추었단 느낌이었습니다. 웹소설 중에서도 아포칼립스를 걷는 우체부, 전지적 독자 시점처럼 아파트 및 사회비판이란 초점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웹툰과 웹소설은 제작비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아파트에서의 탈출이 잘 일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한국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아파트로부터의 탈출은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국열차의 남궁민수가 열차 밖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듯이 아파트 밖에서도 충분히 재밌는 전개를 보여주고 있죠. 물론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블록버스터 영화 중에서는 아직 아파트를 벗어나서 성공한 건 별로 없는 것 같긴 합니다. 대표적으로 부산행의 속편 반도는 아파트에서 벗어났으나 완성도 문제로 흥행에서 실패했죠.
아파트 이후의 아포칼립스의 배경은 어디일까?
아파트란 공간에서 한국 아포칼립스 장르가 벗어난다면 그 이후는 어떤 장소를 택할 수 있을까요? 일단 제 생각은 2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방의 유령도시입니다. 한국의 지방도시는 인구감소로 점점 소멸을 맞이하고 있죠. 그중에서도 소멸이 심한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생존극, 액션 서바이벌은 아포칼립스 장르의 재미를 살릴 수 있다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배 위에서 펼쳐지는 전개를 택하는 겁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떠다니는 배라던가 혹은 좀비가 탑승하고 있는 배에서 벌어지는 생존 스릴러, 이 또한 정말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지방의 유령도시는 도시화가 심하고 인구감소가 심각한 한국에서 제작할 때 더더욱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되네요.
이렇게 아파트와 한국의 아포칼립스 장르를 다루는 글은 끝이 났습니다. 아파트 이후에 한국 아포칼립스가 어떤 배경을 보여줄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분들은 의견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수와 번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