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하러 가는 길

by 다르

그 길은 멀었다.

길이 막혀서도, 위치가 헷갈려서도 아니었다. 마음이 복잡해서 발걸음이 자꾸 느려졌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풍경들. 도로변과 교차로마다 빽빽하게 걸린 현수막, 유세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악과 확성기 소리, 곳곳에서 명함을 건네는 선거 운동원들.

거리는 북적이고 시끄러웠지만, 정작 내가 속한 공간들—카톡방, 단체 채팅방—은 조용하다. 가족도, 친구도, 각종 모임방도 정치 이야기는 조심스레 비껴간다. 지난 선거들을 통해서 우리는 배웠다. 말 한마디, 문자 하나로 관계가 멀어지고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종교에 이어 정치도 ‘다름’을 이야기할 수 있는 대화의 장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대화는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번 선거는 유독, 마음이 무거웠다.

대통령이 졸업도 못 하고 ‘셀프 비상계엄’으로 퇴학을 당했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3일, 나는 중남미 여행 중이었다. 가이드가 “한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라고 전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왜요?”라는 말이 어색하게 흘렀고, 그 뒤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그 장면은 오래전 기억을 불러왔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통근버스 안의 무거운 분위기. 사람들은 말없이 신문을 보고 있었다. 나는 옆 사람의 신문을 곁눈질하다가 ‘대통령 시해’라는 제목을 보고 놀란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날 아침, 나는 버스에 앉은 채 쿵쾅거리는 심장의 소리를 온몸으로 들었다.

10·26 사태 이후 이어졌던 1980년대의 폭력의 시간 들. 그 기억 또한 떠올랐다.

‘비상계엄’이라는 단어는 내게는 여전히 두렵고 여전히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 단어가 2024년에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다니, 말도 안 된다.

제발, 이번에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조용히 지나가기를. 평범한 하루가 그대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늘도 아침 6시에 눈을 떴다.

침대에 누운 채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한동안 멀리했던 뉴스지만, 선거가 다가오니 자꾸 눈길이 간다. 어제 하루 동안 쏟아진 기사들을 찾아 꼼꼼히 읽어 내려간다. 편향된 사고를 피하려 여러 신문사와 방송사를 번갈아 본다. 유튜브에는 자극적인 제목이 넘쳐난다. 클릭은 쉽지만, 사실을 가려내는 일은 어렵다. 결국 다시 돌아와 비교적 정제된 언론사의 기사를 읽는다.

예전엔 원하든 원치 않든 자연스럽게 다양한 매체를 접했지만, 요즘은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시대. 알고리즘은 그 편향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나는 보수도, 진보도 완벽하다고 믿지 않는다. 내 바람은 권력이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것이다. 누가 더 잘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다’라는 원칙. 그 원칙이 지켜질 때 권력은 부패와 오만에서 멀어질 수 있다.

고인 물은 결국 썩는다. 건강한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질서. 정기적인 정권 교체도 그중 하나다. 그래서 투표는 국민의 권리이기 전에 의무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하나쯤은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다. 문제는 그 신념이 정치와 결합할 때다. 아무리 명백한 증거와 판결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 앞에서는 대화도, 진실도 무력해진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폭력으로 정권을 잡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오늘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다면, 후세는 우리를 탓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념보다 현실을 보기로 했다. 내가 부동층이 된 이유다. 우리 사회에 부동층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정당을 가족처럼 끌어안는 사랑은 이쯤에서 놓아주고, 상식과 보편이 통하는 나라 그런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더 많아지길 바란다.


속상하다.

대통령도 직업인데, 세상에 스트레스 없는 직업이 어디 있다고. 다들 가슴에 사표 품고도 묵묵히 출근한다. 어른이니까. 그래서 견디는 거다. 뽑혔다면, 졸업은 하고 나가야지. 퇴학이라니.

대통령 선거가 국민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주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2년 후에 할 고민을 지금 하게 만들어 놓고, 죄송하다는 말도 없다.

그래서, 투표하러 가는 길이 오늘따라 더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비록 내 한 표가 세상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변화의 물결에 작은 물방울 하나 보탤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는 오늘, 생애 처음으로 사전투표를 하러 간다.


그 길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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