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에 볼 수 있어?’
오랜만에 온 K의 카톡. 또 시답잖은 문제로 만나자는 거겠지. 바쁘다고 할까. 아니야 길에서 만나면 껄끄러워. 왜냐고 물어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카톡에 문자로 남겠지. 아무 생각 없이 썼다가 지난번 된통 당한 기억이 있어서 전화로 대답할까 하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전화를 녹음해 놓는다고 했지. 다른 사람과 다투고 난뒤 시시비비를 가리자며 녹음된 통화내용을 보내 상대가 기절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
‘그래. 세탁소 옆 무인 카페에서 보자. 이따 봐.’
K는 청바지에 도톰한 흰색 카디건을 걸치고 앞이마를 살짝 가린 짧은 단발머리 차림으로 카페 문을 들어섰다.
-멋있네. 핏이 살아 있는데. 뭐 마실래. 커피 내가 쏠게. 아~ 차로 마시자. 커피 마시면 잠을 못 잔다고 했지.
-기억하네.
나는 씩 웃으며 얼그레이 두 잔을 뽑아서 창가 탁자로 가지고 갔다. K는 빨간 립스틱을 바른 도톰한 입술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종이컵을 응시한 채 조곤조곤 말을 시작했다.
4월의 오후는 나른했다. 주택가 골목길에서는 사람들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피아노 연주가 흐르는 카페 안에서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K의 목소리에 점점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지금 자니? 중요한 이야기 하고 있잖아.
-성 회장 이야기는 지난번에도 했잖아. 몇 번이나 말해 놓고 왜 또 그 이야기를 해. 졸리게.
-성 회장이 자치위원장 그만뒀다니까. 너도 아는 줄 알았지.
-내가? 뭘 알지. 아는 게 없는데.
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찻잔을 들었고, K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K는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처음 만났다. 숫기 없던 나는 친절하고 상냥한 K와 금세 가까워졌고, 많은 시간과 일들을 함께했다. 다정한 목소리로 끝없이 남의 이야기를 하던 K, 이익이 되는 정보에 유난히 민감한 그녀의 행동력은 남을 의식하는 버릇이 있는 나를 점점 거북하게 만들었다.
-내 기억에 문제가 좀 있나봐. 정말 몰라.
나는 지난주 내 딸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친한 친구한테 아침에 전화가 와, 나한테 섭섭하다고 난리 쳤다는 이야기. 결혼식 안 알렸다고 항의받았다는 이야기까지. 요즘은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못하고 산다며, 내가 뭘 알겠냐고 말했다.
K는 슬그머니 축의금 봉투를 내밀었다. 자기한테도 결혼식 안 알렸다고. 원래 네 성격이 깔끔해서 섭섭했어도 이해는 했다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만나기로 했는데 엉뚱한 소리 하고 있었다며 큰 소리로 웃었다.
-성 회장은 말은 많았지만, 임기는 끝냈어. 근데 자치회장이 아직 공석이야? 하도 사람들한테 시달리니까 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 네가 하면 어때?
-얘가 미쳤나. 내 상태를 보고 말해. 차라리 최 회장한테 다시 해 달라고 하면 어때. 그때 사람들이 엉뚱한 소문을 듣고 가서 따지다가 싸웠잖아. 그래서 그만뒀고. 억울했을 거야. 아마 너도 거기에 한몫했지.
-무슨 소리야? 나도 뒤늦게 알았는데. 최 회장이 자초한 면이 많아.
-왜 내 기억이랑 달라. 너 소문 퍼 나르든 사람들하고 같이 매일 만났잖아.
나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아닌가? 하긴 나도 요새 나를 못 믿겠어.
핸드폰 속 노트 앱을 열자, K가 곁눈질로 화면을 슬쩍 보았다.
-있지. ‘허상회상’이라고 들어봤어. 실제 사실과 기억이 다르게 형성되는 현상인데, 뇌가 완벽하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라나. 좀 걱정되더라고. 내가 기억을 왜곡해서 엉뚱한 상황을 만들까 봐. 사람들 만나고 나면 일기처럼 몇 자씩 메모하는 습관을 들였거든.
5년 전 핸드폰 바꾸고부터 했으니까 3년 전 것은 있겠지. 한번 찾아볼까. K의 눈이 미세하게 떨린다.
노트 검색창에 K를 치자 잠긴 화면이 떴고,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화면이 열렸다.
‘그녀를 만나지 마세요.’
뭐야 이게. 그녀를 믿지 마세요. 도 아니고 만나지 말라니.
하긴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아니지. 만나면 K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나 역시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이 되었지. 그게 싫어서 지난 몇 년간 피해 왔다.
2021년 4월 30일. 마지막으로 입력된 기록이었다.
‘K는 소문의 근원지는 아니었다. 다만 전투적이고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상냥하고 친절하게 남한테 전했다. 최 회장과는 유난히 죽이 잘 맞았다. 그러나 곤경에 처한 최 회장을 외면했다. 짐작컨대 최 회장의 사적인 이야기 대부분은 K가 스스럼없이 풀어놓은 말들이었을 것이다. 나쁜 뜻은 아니었고, 이야기를 좋아해서 생긴 일처럼 보인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말했다.
-축의금 고맙다. 아휴, 참 미워할 수도 없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야! 그래도 말이야. '그녀를 만나지 마세요.' 이런 말을 내가 써서 남겨야 하겠어? 남의 말 좀 그만해. 그리고 녹음도 그만해.
나는 그녀를 등지며 말했다.
-폼나게 좀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