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로를 밀어내는가

정치적 타자화의 심리와 구조

by Edward Alistair Langford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절반만 맞다. 인간은 사회적이되, 선택적으로 사회적이다. 우리는 모든 인간과 연대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 안에서 협력하고 그 집단 바깥을 경계하도록 진화해 왔다. 이 오래된 본능이 현대 정치라는 무대 위에서 젠더 갈등, 세대 갈등, 이념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재연되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심지어 정의롭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타인을 밀어낸다. 이 지점이 핵심이다.


앙리 타슈펠과 존 터너가 정립한 사회정체성이론은 이 현상의 뼈대를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자아의 일부로 내면화한다. 내가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 어느 세대에 속하느냐, 어떤 성별이냐는 단순한 외적 범주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내 집단이 공격받는 것은 나 자신이 공격받는 것으로 처리된다. 방어는 본능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구조적 작동이 추가된다. 내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외부 집단과의 대비다. '우리'는 '그들'이 없으면 선명해지지 않는다. 내집단의 결속은 외집단의 배제를 통해 완성된다. 이것이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집단 유지의 구조적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혐오는 부산물이 아니라 집단 정체성의 연료이기도 하다.


한국의 젠더 갈등을 보면 이 구조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표면적으로는 페미니즘 대 안티페미니즘의 대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자가 자신을 피해자로 위치시키는 경쟁이다. 20대 남성은 군 복무와 취업 시장의 압박 속에서 역차별을 호소하고, 20대 여성은 구조적 불평등과 일상적 위협 속에서 연대를 모색한다. 양쪽 모두 자신의 고통은 실재하고 상대의 고통은 과장되었다고 인식한다.


이 갈등이 특히 격렬해진 이유는 단순히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경제적 자원이 줄어드는 조건에서 두 집단이 동일한 시장에서 경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파이가 충분할 때 사람들은 관대하다. 파이가 줄어들기 시작하면 누가 더 많이 가져가느냐의 문제가 된다. 젠더 갈등은 그 불안의 언어적 표현이고, 상대성별은 그 불안의 인격화된 대상이 된다.


여기에 온라인 공간이 결정적인 증폭기로 작동했다. 알고리즘은 분노를 먹고 자란다. 분노는 클릭을 만들고, 클릭은 수익을 만든다. 플랫폼은 사용자가 가장 극단적인 콘텐츠에 오래 머문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방향으로 피드를 구성한다. 이용자들은 자신이 합리적으로 정보를 소비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분노를 정교하게 큐레이션 한 환경 속에 있다.


세대 갈등의 구조는 조금 다르다. 젠더 갈등이 자원을 둘러싼 동시대적 경쟁이라면, 세대 갈등은 시간 축을 따라 벌어지는 책임 전가의 싸움이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집합적 자부심을 품고 있다. 이 서사 속에서 청년 세대의 불만은 나태함이나 감사함의 결여로 해석된다. 반대로 청년 세대의 눈에 기성세대는 부동산과 연금이라는 구조적 이득을 선점하고 사다리를 걷어찬 집단으로 보인다. 양측 모두 자신의 서사 안에서는 완전히 합리적이다. 문제는 두 서사가 공유하는 공통 기반이 없다는 것이다.


세대 담론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구조적 문제를 인격화하기 때문이다. 청년 고용의 문제, 주거 문제, 복지 재정의 지속가능성 문제는 모두 정책적·구조적 차원의 문제다. 그런데 이것이 '꼰대 vs MZ'의 문화적 갈등으로 번역되는 순간,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과제에서 감정적 전쟁으로 전환된다. 적을 특정하는 것은 속 시원하지만, 그 적을 제거해도 문제는 남는다.


이념 갈등. 즉 좌우 갈등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교하게 발전한 타자화의 형식이다. 단순히 정책 선호의 차이가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근본적인 인식론적 틀의 차이이기 때문에 타협이 구조적으로 어렵다.


좌파적 시각에서 세계는 권력 불평등의 산물이고, 그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 정의다. 우파적 시각에서 세계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선택과 경쟁의 결과이고, 그 결과를 존중하는 것이 질서다. 이 두 틀은 같은 현실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상대방은 틀린 것이 아니라 나쁜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도덕적 결함의 소유자로 인식되는 것이다.


조너선 하이트의 연구는 이 지점에서 중요한 통찰을 준다. 그는 좌파와 우파가 도덕적 직관의 구성 자체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좌파는 배려와 공정성을 중심 도덕 축으로 삼는 경향이 있고, 우파는 여기에 더해 충성, 권위, 순결 같은 가치를 더 강하게 가중한다. 이것은 어느 쪽이 더 도덕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 자체의 구성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상대방이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 정치에서 이 구도는 더욱 복잡해진다. 한국의 좌우 갈등은 순수한 경제적 재분배 논쟁이 아니라 역사 인식, 대북 정책, 민족주의, 반공주의가 층층이 쌓인 복합 구조다. 여기에 지역주의라는 또 다른 균열이 교차한다. 이 다중적 균열 구조 속에서 정치는 이해관계의 조정이 아니라 정체성 전쟁의 장이 된다.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와야 한다. 왜 이것이 단순한 의견 차이로 남지 않고 혐오로 발전하는가.


답은 앞서 말한 정체성 융합에 있다. 의견이 자아와 분리되어 있을 때 우리는 의견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의견이 정체성이 되어버린 순간, 의견을 바꾸는 것은 자아를 해체하는 것이 된다. 그 위협 앞에서 인간은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선택한다. 상대를 논리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인격적으로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간다. 조롱과 혐오는 논증의 실패가 아니라 정체성 방어의 합리적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인 역설이 발생한다. 이 모든 과정이 '합리적 판단'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진행된다는 것이다. 상대를 혐오하는 사람은 자신이 감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증거를 갖고 있고, 논리를 갖고 있고, 역사가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 증거와 논리와 역사가 모두 자기 결론을 향해 역방향으로 조립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기화된 추론은 이성의 언어를 빌려 감정의 목적지로 향한다.


그렇다면 이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가.


완전한 탈출은 불가능하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인간 인지와 사회 구조의 문제이지 개인의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는 만들 수 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나도 이 구조 안에 있다"라는 인식이다. 자신이 타자화의 메커니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미 그 메커니즘 안에 가장 깊이 들어가 있다.


정치적 타자에 대한 혐오를 느낄 때, 그것이 순수한 도덕적 판단인지 아니면 정체성 방어의 감정적 반응인지를 물을 수 있는 사람.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 그것이 이 구조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에 가장 가깝다.

이전 08화균형이라는 이름의 면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