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북한 도발 논쟁에서 반복되는 whataboutism(그쪽이야말로주의. 소련에서 서구 세계와 대적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쓰인 선전 기법의 일종으로 냉전 시기 소련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때, 그에 대한 반박으로 '그쪽이야말로...' (What about...)라는 말을 꺼내며 서구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을 거론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며 상대가 처음에 잘못을 지적하면 그것을 반박하거나 틀렸다고 입증하는 대신, 상대가 같은 입장에서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 왔다고 내세움으로서 상대의 신임을 떨어뜨리려는 논리적 오류인 피장파장의 오류의 대표적인 예) 비판
어느 커뮤니티에서나 북한의 도발이나 인권 침해를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패턴이 있다. "그래도 한국도 잘못한 게 있잖아요."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6.25 이전의 국지전, 한미연합훈련, 금강산 관광지에서 벌어진 음주운전 사고, 대청해전에서의 교전, 전단 살포, 대북제재까지. 이런 사례들이 소환되는 방식은 언제나 비슷하다. 맥락은 제거되고, 규모는 생략되며, 의도와 결과는 뭉개진 채로 "결국 양쪽 다 문제 아닌가"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글은 그 결론이 왜 지적으로 불성실한지, 그리고 왜 그것이 단순한 논리적 오류를 넘어 실질적으로 북한 체제에 이로운 담론을 생산하는지를 논한다.
먼저 짚어둘 게 있다. 한국이 저지른 과오를 지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역시 군사 독재 시절의 인권 침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의혹,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국가 폭력 등 직면해야 할 역사적 부채가 있다. 그 사실을 직시하고 비판하는 일은 민주공화국이 자신의 과거에 책임을 지는 방식이며, 가능한 한 멀리까지 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과 "한국도 북한이랑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전자는 역사적 책임을 묻는 것이고, 후자는 도덕적 판단 자체를 마비시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건 개별 사례 비교가 아니라, 그 비교가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규모, 의도, 체계성, 현재성, 그리고 구조적 성격을 무시한 채 단일 사건들을 나열해 동격으로 놓는 방법론이 핵심 결함이다.
가장 자주 동원되는 사례들을 순서대로 검토해보자.
6.25 이전 국지전은 38선을 경계로 양측이 충돌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흔히 생략되는 맥락은 그 충돌의 선제성과 규모에서 북한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1949년 옹진반도 등지에서의 충돌 역시 북한의 주도적 침투와 도발이 더 빈번했다는 것이 군사사 연구의 일반적 평가다. 그리고 이 모든 국지전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귀결됐다. 전쟁 중 북한은 전시납북자를 10만 명 내외로 추산될 만큼 조직적으로 민간인을 납치했고, 정전협정 당시 국군 실종자가 약 8만2천 명으로 추정되나 포로교환을 통해 귀환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7만 명이 넘는 이들은 광산과 탄광에 배치돼 소모품으로 취급됐다는 게 귀환자들의 증언이다. 6.25 이전 국지전의 충돌 몇 건을 이 구조적 침략의 '등가물'로 제시하는 건, 원인과 결과를 뒤섞는 것이다.
한미연합훈련을 "도발"로 규정하는 논법은 더 단순한 구조적 오류를 갖고 있다. 방어적 성격의 정기 군사훈련과 선제적·기습적 공격을 같은 범주에 놓으려면, 훈련을 빌미로 이것을 도발이라고 규정하는 북한의 공식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주목할 건 한미연합훈련이 한국의 안보 주권에 속하는 사안이라는 점이다. 핵 보유국이 자국 국경 바로 위에서 60년 넘게 끊임없이 위협을 가해온 상황에서, 그에 대응한 방어 준비를 "도발"로 재명명하는 논법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뒤바꾸는 효과를 낳는다.
금강산 사건이 동원되는 방식은 더욱 놀랍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가 새벽에 통제구역을 벗어나 걷다가 북한 경비병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과 일부에서 카운터파트로 제시하는 음주운전 사망 사건은 범주 자체가 다르다. 하나는 비무장 민간 관광객을 국가 기관원이 총으로 쏴 죽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주운전이라는 사고다. 의도성, 국가 개입 여부, 법적 성격 어느 기준으로도 이 둘은 동급이 아니다. 이것을 균형의 이름으로 나란히 놓는 순간, "총격 살해"와 "교통사고"가 도덕적으로 동등한 무게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가 발생한다.
대청해전은 2009년 11월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해 발생한 교전이다. 한국 해군이 교전 끝에 북한 경비정을 격퇴한 이 사건을 "한국도 싸웠다"는 근거로 제시하는 건, 침범한 쪽과 대응한 쪽을 동격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자국 영해를 수호하기 위한 교전을 침략과 같은 무게로 다루는 논리라면, 방어권 자체를 부정하는 귀결로 이어진다.
전단 살포 문제도 자주 등장한다. 대북 전단 살포가 접경 지역 주민들에게 미치는 안전 위협. 그리고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질적인 논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단 살포를 빌미로 "한국도 심리전을 한다"는 식으로 북한의 확성기 방송과 동격화하려는 시도는 그 성격을 혼동한다. 북한의 확성기 방송은 국가가 직접 운용하며 군사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한국의 전단 살포는 상당 기간 민간단체 주도로 이루어졌고, 내용은 정보 제공과 체제 비판이지 군사 위협이 아니다. 이것을 대칭으로 제시하는 논법에도 성격의 불균형이 있다.
대북제재와 경제봉쇄가 "북한 주민을 굶기는 원인"이라는 주장도 자주 나온다. 이 주장의 구조를 정직하게 해부하면,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을 지속한 결과로 부과된 국제 제재의 책임을 제재 부과국에 전가하는 논리다. 북한은 주민들이 굶는 동안에도 핵·미사일 개발에 천문학적 자원을 투입해왔다. 굶주림의 직접적 원인이 외부 제재인지, 아니면 내부의 자원 배분 실패와 군사 우선 정책인지를 따지지 않은 채 "제재가 주민을 죽인다"고 단선적으로 주장하는 건, 북한 체제의 자기 책임을 지우는 효과를 낳는다.
이 논의에서 가장 쉽게 잊히는 사안이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다. 정전협정 이후에만 총 3,835명이 납북되었으며, 현재도 북한 내 전후납북자는 516명으로 추정된다. 전쟁 중 납북자를 포함하면 그 규모는 10만 명 내외에 달한다. 이들 중 상당수와 그 2세들이 지금 이 순간 북한 체제 하에 억류된 채 살고 있다는 게 통일부의 공식 추산이다. 이것은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인권 침해다.
그런데 이 사안을 남북 비교 논의에 끌어들이면 양비론자들은 거의 대응하지 못한다. 한국이 자국 국민을 수십 년째 타국에 조직적으로 억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교가 성립하려면 최소한 구조적으로 유사한 행위가 양측 모두에 있어야 한다.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는 그 자체로 이 논쟁의 비대칭성을 증명하는 사례다.
2010년은 이 비대칭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해다. 천안함은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해상에서 북한의 어뢰에 의해 폭침됐고,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해 해병대원 전사자 2명, 군인 부상자 16명, 민간인 사망자 2명, 민간인 부상자 3명이 발생했고, 연평도의 각종 시설이 파괴됐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북한이 대한민국 영토를 직접 타격해 민간인이 사망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두 사건에 대해서도 일부는 "한미훈련이 자극했다", "NLL 자체가 논쟁적이다"라는 식의 맥락 흐리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비무장 민간인이 거주하는 섬에 포탄을 쏘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도발의 등가물이 한국 측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첨부된 글(주적글을 의미함)이 제기한 핵심 질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주적"이라는 단어가 학문적으로 표준화된 개념인지 아닌지의 논쟁은 일단 차치하자. 그 질문과 별개로, 북한이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과 그 공동체에 대해 어떤 성격의 존재인지는 사실의 차원에서 충분히 논할 수 있다.
공화국(Republic)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공의 사안(res publica)을 시민들이 공유하며, 어느 누구도 자의적 지배에 굴복하지 않는 정치 공동체다. 필립 페팃의 신공화주의 프레임을 빌리면, 공화적 자유의 핵심은 단순히 간섭의 부재가 아니라 지배의 부재(non-domination)다. 타인의 자의적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 자체가 자유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서 북한이 대한민국 공동체에 가해온 것들을 다시 정리해보면, 북한은 단순히 "위협적인 이웃 국가"가 아니다. 북한의 헌법과 조선로동당 규약. 그리고 김정은이 2024년 2월 건군절 연설에서 직접 밝힌 내용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북한 국가 체계 내에서 "제1의 적대국가,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유사시 그 영토를 점령, 평정"하는 것이 북한의 국시로 명문화되어 있다. 이것은 수사가 아니라 체제의 공식 목표다.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과 그 안에 사는 시민들의 공동체를 해체하겠다는 의지가 법규범 수준에서 제도화된 유일한 행위자가 북한이다.
헌법재판소도 이 점을 명시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북한은 "평화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임과 동시에 대남적화노선을 고수하면서 우리 자유민주체제전복을 꾀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헌법재판소 결정의 표현이다. 국가기관이 법적 판단 형식으로 확인한 이 진술은 감정적 적대감의 산물이 아니라, 북한 체제의 실제 구조적 성격에 대한 법적 평가다.
체제의 내부를 들여다봐도 마찬가지다. 북한 주민들은 선거라는 형식이 존재하지만 이미 이름이 찍힌 투표용지를 함에 넣는 절차를 "선거"라 부른다. 정치범수용소에는 추정치로 15만에서 20만 명이 수용되어 있다. 탈북 주민들의 증언은 연좌제가 실질적으로 작동함을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정보는 통제되고, 이동은 제한되며, 시장 경제적 행위조차 범죄화되는 경우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다. 북한은 자국 주민에 대해서도 공화적 의미의 자유를 구조적으로 부정하는 체제다. 외부에 대한 군사적 위협과 내부에 대한 전체주의적 통제는 동일한 체제 논리의 두 표현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왜 일부는 북한의 도발 앞에서 한국의 행위를 소환하는가. 그 동기는 일률적이지 않다. 맥락 없는 파편적 정보를 과잉 일반화한 인식론적 오류일 수도 있고, 균형을 추구한다는 착각 속에서 실제론 특정 방향으로 기울어진 이념적 편향일 수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엔 의도적인 담론 전략이기도 하다.
문제는 동기가 무엇이든 이 논법이 생산하는 효과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첫째. 비판의 논점이 이동한다. 북한의 행위에 대한 집중적 검토 대신, 한국의 행위를 방어해야 하는 논쟁 구조가 만들어진다. 둘째. 도덕적 판단이 보류된다. "양쪽 다 문제"라는 결론은 어느 쪽에도 명확한 책임을 귀속시키지 않는다. 셋째. 북한 체제의 본질이 희석된다. 개별 사건의 나열은 체제의 구조적 성격이 아니라 우발적 사건들의 목록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것이 whataboutism의 수사적 효과다. 논리적으로는 약하지만, 담론적으로는 강력하다. 비판자를 위선자로 만들고, 명확한 판단을 "단순한 사고"로 취급하게 만들며, 복잡한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체제 비판의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첨부된 글이 정확히 짚어낸 것처럼, 문제는 단어가 아니라 단어를 둘러싼 정치화다. "주적"이라는 표현을 쓰든 안 쓰든, 북한이 대한민국이란 공화국의 존립과 시민 공동체를 겨냥한 구조적 위협이라는 사실은 어떤 단어로 부르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말로 희석시키는 논법은 의도하든 아니든, 그 위협의 수혜자가 누구인지를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북한 체제에 가장 불편한 것은 강경한 수사가 아니다. 규모와 의도와 구조를 정확히 따지는 냉정한 비교다. 양비론은 그 비교를 방해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그것이 이 논법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