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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병가 일지

by 딜피

또 다른 지옥굴에 들어왔음에도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

이미 누적된 피로치가 너무나도 심했고, 또 다른 이직 기회를 놓쳤다.

면접을 너무나도 잘 봤고, 면접관들도 반응이 좋았다고 생각됐는데.. 또 한번 기회가 날라가니

그때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도 돈이라도 더 주는데 가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했기 때문에,,

누적된 데미지에 한 방이 또 날아오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목요일에 결과가 통보됐기에 주말 사이에 또 술을 마시고 땅굴을 파고 들어갔다가 일요일쯤 묘하게 머릿속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진짜 쉬자."


월요일에 마음 굳게 먹고 출근을 했지만, 여전히 힘든 상황에 부딪히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자

바로 엄마에게 전화해서 숨이 안쉬어진다며 울고불고 한 따까리를 했다.

엄마도 참 어려운 딸내미 두셨다.


화요일에 다시금 가라앉은 마음으로 다시 엄마께 전화를 걸어

아는 친척분이 근무하신다는 정신건강의학과에 예약을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정말 마음이 굳건하다고.

그때까지도 엄마는 반신반의했고, 진짜 병가를 쓰는게 맞는 일인지 (내심 병가를 쓰지 않았으면 하신 듯하다)

내가 너무 단호하니 말은 안했지만 계속 그런 뉘앙스를 비치셨다.


그냥 그만두고 대전 내려와서 집안일이나 도와달라고 하셨지만,

고용 불안정의 상태를 내가 버틸 수 있을까?

다시 새로운 곳을 알아봐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더 미치게 할 것을 나는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병원에 예약을 했으나 5주는 기다려야한다고 했고,

5주 동안 차분하게 회사생활을 이어나가고 그동안에 갔던 병원에 다시가 진료 의뢰서를 받아왔다.

나는 확고했으나 엄마는 정말 안쉬었으면 했는지 아는 친척분께 얘기를 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정말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고,

그렇다고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나아갈 만큼의 체력이나 정신력이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매일 출근해서 사무실에서 숨이 쉬어지지 않고 화부터 나고,

다녀와서는 폭음만 하고 집에서 한 발짝 나아가지 않는, 그리고 몸이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이 상태가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병원 예약 일자가 다가왔음에도 내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엄마는 대놓고 병가를 내는 것이 앞으로의 나의 커리어나 다른 회사에 이직을 하게 될 때에도 안좋게 작용하지 않을까 걱정을 전하셨다.


그래서 내가 정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직무도 바꾸고 회사도 바꾸고, 새로운 모험에도 도전했다 실패하신 선배님께 가서 40분간을 울면서 고민상담을 했고 정말 많은 도움과 용기를 주셨다.

뭐든 할 수 있다고, 그리고 복귀해서 자기 일 다시 성실하게 해내면 그런건 영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보니 이전에도 병가를 내고 복귀했던 다른 선배님도 계셨는데 그분이 병가를 내셨었다는 사실을 2년이 지나고 나니 차마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득하지 않냐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셨다.


다만, 회사가 싫은건지 직무가 싫은건지 사람이 싫은건지, 그 우선순위는 쉬면서 정해오라고 미션아닌 미션을 주긴 하셨다. 맞는 말이다.. 정말 다 싫지만, 그 중에 우선순위는 생각해보자.


그렇게 내 의지가 확고함을 다시 엄마에게 전달했고, 그제서야 그 친척분께 나의 상황이 전달되었다.


긴장한 진료 날, 무슨 일때문인지도 말 안하고 반차를 냈고, 오랜만에 모교에 있는 병원을 가게 되었다.

환자 정보가 대학교 신입생 때 정보로 되어있더라..


진료는 생각보다 허무하게 끝났다. 진료의뢰서에 적혀있던 내역들을 보시면서 진지하게 걱정해주셨고,

다시 1차 병원 진료를 꾸준히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약을 꾸준히 먹지 않았다는 상담 내역이 다 적혀 있었고 그 부분을 좀 못마땅하게 보시긴 하셨다.


10분간의 짧은 진료가 끝나고 바로 발급된 진단서를 보고 정말 후련하기도 하고 묘하기도 했다.

이렇게 쉽게 된다고? 그럼 바로 쉬는 걸 얘기해야한다고? 그럼 바로 쉬게 된다고?

오랜만에 모교 구경도 할 겸 캠퍼스를 걷는데 축제더라.

축제 즐기는 모습들을 구경하며 더 묘하게 여러 감정이 뒤섞인 혼란스러움을 안고 귀가했다.


주말사이 어떻게 말할지 고민되면서도 별로 두렵거나 안될까봐 걱정되는 마음은 또 없었다.

이렇게 무대뽀였나 싶고, 안되면 그만둔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면담을 요청하고 처음 말을 꺼냈을때는 걱정하면서 당연히 써야지~ 라고 하던 팀장도

며칠 뒤에 불러서는 3개월만 쉴수 있다 그 사건이 벌써 몇년이 되었는데 왜 아직도 힘드냐 회사는 항상 힘들다 는 식의 소시오패스같은 발언을 들으며,, 걍 아예 그만둘까 다시 돌아오기 싫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쉬자,, 쉬면 또 이런 사람들을 견딜 힘이 생길 수도 있을거야 싶었다.


인사팀 면담도 이어졌고, 사무적인 태도로 이어진 면담 마지막에

직무를 옮겨주지 않아서냐(병가를 결심하고 기록을 남길 용도로 인사팀에 찾아가 직무 변경 요청을 한 적이 있다) 라고 물었고, 그 이유가 없지는 않다고 말씀드리고 왔다.


어쨌든 병가의 시발점도 회사 일이고, 병가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도 회사의 잘못된 인사 조치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게 무슨 소용이냐 싶지만.


그렇게 말을 꺼낸지 2주만에 남은 연차 소진+3개월의 병가를 들어가게 되었다.


너무 후련해서였을까, 마지막 출근날 아침부터 목이 아프고 열감이 들더니

현충일 연휴 내내 생리통과 함께 감기 몸살에 시달리며 침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우당탕탕 병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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