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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잇 Feb 05. 2020

조기축구가 국가대표를 지적하는 민망함의 비밀

북리뷰,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김혼비 저 | 민음사 | 2018


스포츠가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운동장이 평평하기 때문이다. 룰이 보장하는 평등은 ‘드라마틱한 경쟁’의 필수조건이다. 따라서 평등의 조건을 깨려는 시도들, 금지약물 복용이나 승부 조작과 같은 행위들이 범죄로 규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해치니까!


스포츠는 경기장이 평평할수록 아름다운 법이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스포츠는 이곳저곳 잘도 기울어져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축구는 남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아저씨들의 조기축구’나 ‘군대에서 축구 했던 얘기’와 같이 일상에서의 축구는 늘 남성을 연상시키거나 남성과 연관된 형태로 소비된다. 스포츠 중에서도 거칠고 무질서한 축구는 지난 시대가 남성에게 부여한 이미지와는 싱크로율이 높지만, 여성에게 부여한 이미지와는 상충된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 삶 곳곳에 배어있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 구분, 고정된 이미지, ‘남자는 이래, 여자는 저래’하는 남성 혐오, 여성 혐오는 여성이 축구장에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높은 장벽이 되어 우뚝 서 있다.


이번에 소개할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는 30대 중반 여성(이 책의 저자인 김혼비 작가 본인)이 저 높은 장벽을 힘겹게 넘어 축구라는 세계에 들어서고, 동시에 그녀의 삶에 축구가 들어서며, “사는 옷과 신발이 달라지고, 몸의 자세가 달라지고, 마음의 자세가 달라지고, 몸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달라지고, 축구의 경험이 쌓이는 만큼 몸과 마음의 어떤 감각들이 깨어나는 걸 느끼며, 축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을 느끼며(p.8~9)” 겪은 여자축구 동호회 정착기다.


무엇보다 이 책은 세상 재미있다. 누군가 책 읽기가 재미없다면, 재미없는 그 책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에게 흥미로운 책이라면 잠도 안 자고 읽지 않을까? "나는 독서랑 잘 안 맞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즐거운 독서의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또,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유려하고 유머 있는 김혼비 작가의 글 솜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녀의 ‘축구’ 이야기에 여러 번 배꼽잡고 또 가끔 훌쩍이며 잃어버린 독서의 낭만을 찾을지도 모른다.


“나의 킥은 느리고 우아하게 너희들의 ‘코칭’을 넘어가지” p.60


2014년 온라인 옥스포드 사전에 등재된 ‘맨스플래인(mansplian)’이란 신조어가 최근 유행이다. 이 단어는 man(남자)과 explain(설명하다)의 합성어로 일부 남성들이 우월함을 과시하려 불쾌할 만큼 지나치게 설명하려 드는 것을 말하는데, 여자가 축구를 좋아한다거나 심지어 직접 한다고 하면 맨스플래인의 표적이 되기 일쑤라고 한다. 사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만 하더라도(나는 30대다) 과학교과서에서는 하얀 가운을 입은 철수가 영희에게 과학 개념을 설명하고, 체육 교과서에서는 남자는 경기를, 여자는 응원을 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설명하는 장면, 여자는 스포츠에 대해 잘 모른다는 인식은 우리 시대에는 익숙해서, 그래서 편견이 되어버렸다. 이런 편견이 걸러지지 않으면 아래처럼 나타난다.


“…그녀가 아무리 축구를 오래 봐 왔다고 하더라도(심지어 그 남자보다 자주, 오래 봤더라도!) 꼭 가르치려 든다. 축구 규칙이든 축구 상식이든 뭐든. 단골 질문인 “오프사이드가 뭔지 알아요?”를 시작으로, 갑자기 소크라테스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네가 안다고 믿는 것이 사실 진짜 아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겠다.’라는 철학적 일념으로 집요하게 산파술식 질문법을 펼치기도 한다. p.47


김혼비 작가가 속한 여자축구팀은 같은 여자팀이나 혹은 남자 시니어팀과 주로 연습경기를 한다. 한번은 40~50대로 구성된 비교적 젊은 남자팀과의 연습경기가 있던 날, 전반전을 마친 후 상대 팀 남자 2명이 쉬고 있던 여자축구팀에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0:1로 마친 전반전이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부끄러움을 몰라서 그랬는지, 난데없이 맨스플래인을 시전했다고 한다.


“…근데 여자 팀이랑 뛸 때는 아무래도 차이가 나니까 미안해서 그렇게 안 되더라고. 내가 보니까 이 팀도 다들 잘하시는 편인데 그래도 아쉬운 플레이들이 꽤 많다니까. 혹시 선출이세요? 그렇지? 선출이지? 그럴 거 같더라. 근데 선출들 중에 너무 멋 부리면서 축구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그냥 한 번만 꺾어도 될 건데, 왜 굳이 두 번 세 번 꺾어? p.53


하필 이 난데없는 지적 혹은 코칭을 받은 대상은 문자 그대로 ‘축구 할 만큼 해본’ 국가대표 출신의 주장이었다. 이보다 민망한 순간이 있을까. 하여튼 국가대표를 불쾌하게 한 대가는 치러야 했다. 후반전, 주장은 빈 공간이 훤한데도 난데없이 코칭을 일삼은 ‘코치’에게 난데없이 볼을 몰고 가서는 가벼운 패인팅으로 제치고(한 번만 꺾어서), 다른 수비도 따돌린 후 로빙슛으로, 느리고 우아하지만 당하는 처지에서는 굴욕적인 그 슛으로 득점을 해버렸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그랬던가.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성경 잠언 10장 19절)”고.  


편견이 이렇게 무섭다.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을 가르치려 들게 만든다. 우리는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렇게 무서운 편견과 혐오들 속에 살고 있다. 200년 전, 개인을 존중하는 시민사회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근대. 근대시대의 정신 그 자체인 헤겔(정반합의 그 헤겔 맞다)은 중국을 “공간만 있고 시간이 없는 나라”라며 동양을 혐오했고, 동시대에 이 거대한 철학자를 비판했던 또 다른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여자는 오로지 종의 번식을 위해서만 창조되었다”라며 여성을 혐오했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에서 흑인 노예가 해방된 지 겨우 150년 정도 지났다. 150년 전에는 피부색이 검은 사람을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마치 동물처럼 하등이 여기는 것이 상식적인 태도였다.  


생각해보면 150년 전이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던 시대다. 같은 미국에서 여성이 선거권을 얻은 시기는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인식의 큰 틀은 변하였을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 삶의 곳곳에는 편견과 혐오의 흔적들은 남아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인종과 성별에 대해서 뿐 아니라 외모, 학벌, 지역, 취향 등에 대한 얼마나 많은 편견과 혐오가 편재하는가. 그리고 스포츠는 특히 성별에 대한 편견이 보다 날것의 형태로 남아있는 세계다. 헤겔이 이 책을 읽었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역시 동양의 축구장은 공간만 있고 시간은 없군.”


편견에서 비롯되는 ‘맨스플래인’이 불쾌감을 주는 이유는 아마도 우월의식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우월의식은 상대방을 열등하게 바라본다. 잘난 사람이 잘난 척을 해도 고까울 판에 누군지도 모르면서 은근슬쩍 상대방을 열등이 여기는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이지 민망하지 아니한가?! 일상에서 은근히 발생하는 이런 종류의 민망함과 불쾌감이 쌓이고 쌓이면 장벽이 된다. 관계에 쌓인 담이 되기도 하고, 축구장에서는 여성에게 진입장벽이 되어버린다. 예전에 ‘알쓸신잡' 에서 과학자 김상욱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더라. “과학적으로는 사람이나 돼지나 크게 다를 게 없다”라고. 하물며 같은 사람끼리 우와 열을 나누어봤자 얼마나 다를까 싶다. 비록 부분적으로 차이가 존재할 수는 있지만 부분적 다름이 개체의 우열을 의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저 다를 뿐.  

경기를 지배하는 룰이 어떠한 편견도 없이 모든 선수를 동등한 조건으로 대할 때, 스포츠는 “어쩔 줄 모를 만큼” 재미있고 때로 아름답다. 스포츠는 평등할수록 아름다운 법이니까.  

이 외에도,
“경기장 안에 오프더볼 상태 못지않게 경기장 밖 오프더볼 상태도 경기를 크게 좌우하는” 이야기,
“때로 유니폼의 커다란 가시성은 그 안의 개인을 지나치게 비가시화하는” 이야기,
“수년간 월패스를 통해 열어젖힌 무수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 등축구장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있다. 축구가 얼마나 재밌는지, 독서가 얼마나 재밌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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