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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잇 Feb 26. 2023

한국 운동부와 미국 스포츠클럽

스포츠는 존재 가능성을 축소하는가 아니면 확장하는가.

기억하건대, 내가 초등학교 때 (20년도 더 전에) 축구선수나 태권도선수를 장래 희망으로 꼽는 학생이 한 반에 10명씩은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물론 그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운동선수를 하기 위해서는 운동부에 들어가야 한다. 만약 우리 학교에 내가 원하는 운동부가 없으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다. 친구들을 뒤로하고 전학을 가야 하는 것부터, 한국에서 운동선수가 되기로 한다면 포기해야 하는 것,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 꽤 많다. 왜냐하면 학생선수라 일컫는 운동부 아이들과 일반학생이라 일컫는 그 외 아이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담장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학생선수가 되면 일반학생의 영역에 들어설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학년이 더할수록 담장도 높아진다. 학생선수가 공부와 담쌓는 게 아니라 담장 너머로 이사 가는 것이다. 


먼저, 학생선수가 되면 진로 가능성의 축소를 감수해야 한다. 체육특기자라로 구분되는 학생선수는 공부를 안 해도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억압적” 특혜를 받는다. 이 특혜는 공부하면 바보로 취급받는 이상한 운동부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렇다고 학생선수의 프로스포츠 취업률이 높은 것도 아니다. 높은 게 아닌 게 아니라 대부분 못한다. 전국 고등학교 축구부를 적게 잡아 100개로 치고 10명씩 졸업한다고 생각하면 1,000명이 졸업하는데 K리그1에 12개 구단이 있다. K리그1 등록 선수는 800명 정도 되는데, 현역 선수 경력수명을 10년이라고 생각하면 고등학교 축구부를 졸업한 10,000명 중에 800명 정도만 K리그1에서 선수 생활을 한다. 이 부실한 계산보다 현실은 더 부실할 테다. 프로선수가 되지 못한 90% 이상의 학생선수는 준비된 것 없이 사회에 던져진다. 민주 시민과 사회 구성원이 되도록 준비하는 청소년기 동안 사회와 담쌓은 배타적 운동부 세계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학생선수가 되면 학창시절의 그리운 추억 따위는 포기해야 한다. 흡사 군대와 같은 운동부 합숙 생활은 민주 시민의 교양과 덕목을 저해하는 생활양식을 학습하게 한다. 코치로부터, 선배로부터 소집되는 상습적 집합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선배가 후배를 “따까리” 삼아 빨래시키고 심부름시키고 구타하는 것이 그곳의 생활양식이다. “거기서도 다 배울 게 있다고” 말하고 싶다면, 맞다. 세상 부도덕이란 부도덕은 다 배울 수 있다. 그곳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어른이라고는 코치밖에 없는데, 뒷돈 받고, 뒷돈 주고, 상대편을 “담가”서라도 이기는 게 중요한 승부의 세계, 운동부에선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을 배운다. 그리고 지금은 21세기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축구부에 있을 때 심심하면 일반학생의 삶을 동경하는 대화를 하곤 했다. 교복 입고 붐비는 버스 타고 등교해보고 싶다는 둥, 축제나 수학여행 가보고 싶다는 둥. 그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일까. 모르겠다. 적어도 그립진 않다. 누가 이런 구조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누구도 아니겠지), 나는 이게 좀 싫다. 그 회의감이거나 증오감이거나 하는 것들이 뒤섞인 문제의식이 나를 부추겼다. 스포츠가 뭔지 한번 공부해 보라고.


미국에 와서 스포츠를 공부하기 시작한 지 이제 1년 하고도 반이 되어간다. 여기서는 어린 시절 운동선수를 꿈꾸는 일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미국의 초중고 학교는 대부분 여러 종목의 스포츠클럽을 운영하고 학교에 없는 종목은 지역에서 운영한다. 왜냐하면 모든 학생이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기 전까지 딱히 학생선수라는 개념이 없다. 원하면 누구나 스포츠 활동을 하기 때문에, 일반학생과 학생선수라는 구분이라고 할 만한 게 딱히 없다. 학창 시절 스포츠 활동은 미래 가능성을 축소하거나 부도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 가능성은 확장되고 인간적 성장과 학창 시절의 삶은 풍성해진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심지어 여러 종목을 겸하는 것이 권고된다. 미국 스포츠 클럽은 시즌별로 운영된다. 예를 들면 겨울엔 농구, 봄엔 테니스, 여름엔 축구클럽을 운영 한다. 그리고 운동에 소질 있거나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은 시즌마다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한다. 이것이 선수로서의 발달에도 더 유리하다고 믿는다. 스포츠 학문 용어 중에 early-specializa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성장기에 한 종목에 올인하는 방식은 오히려 운동능력 성장을 방해한다는 개념이다. 한 아이의 잠재적 운동능력을 더 효율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몸을 쓰고 훈련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대학 학생선수가 NFL과 MLB 사이에서 고민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한국에서 학생선수가 되면 다른 종목은 고사하고 조기축구도 못 나가게 하는 것과 매우 상반되는 지점이다. 


스포츠는 무엇이고 운동선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도르노에 따르면 스포츠는 대중을 우매하게 만들어 자본과 힘의 불평등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마치 마약과 같은 대중문화산업에 불과하고, 운동선수는 대중의 취향을 만들고 소비를 부추기는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적 착취를 강화하는 육체노동자, 즉 자본가의 수단에 불과하다. 반면, 존 우든에 따르면 스포츠를 배우는 것은 민주 시민의 덕목을 배우는 것과 같고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스포츠는 세상을 인식하고 세상과 관계하는 인간 존재 가능성의 발휘이자 동시에 그 존재 가능성의 확장이다. 


나는 스포츠가 인간 존재 가능성을 확장하는 개념이면 좋겠다. 그리고 자본주의나 민족주의의 수단이 되는 스포츠를 왜곡된 형태라고 믿고 싶다. 보통 스포츠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나 19세기 영국에서 찾지만, 가장 신빙성 있는 이론은 호모루덴스의 놀이하는 인간일 것이다. 나는 놀고 싶은 인간 본성에 스포츠의 기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그 현상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관리하고 사용하는지는 인간 스스로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신은 5일 동안 세상을 만들고 6일째 인간을 만들고는 본인 대신 세상을 다스리라고 했다. 스포츠가 대중을 우매하게 하고 착취하거나 인간 존재 가능성을 축소하는 수단이 되느냐, 아니면 더 나은 인간과 사회를 만들고 인간 존재 가능성을 확장하는 활동이 되느냐는 인간 스스로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스포츠를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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