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p29.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 적대를, 다정함보다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
p32.
그 시절의 나는, 부모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부모의 지시를 따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에 의해 창조되었고 부모의 통제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나와 로봇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p60.
모든 부모가 언젠가는 아이를 실망시키고, 그 실망은 도둑맞은 신발 같은 사소한 사건 때문에도 비롯된다는 것, 그 누구도 그걸 피할 수 없고, 나처럼 어떤 아이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그 사소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기억하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그게 부모를 증오하거나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p63.
제사는 산 자들이 정색하며 공연하는 한 편의 연극이며 주제는 기억이다. 창과 문을 열어 귀신을 환영한다는 뜻을 표하고 지방에 조상의 이름을 써서 태운다.
p72.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p99.
세상에는 나를 대신해서 나를 보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의 어떤 면을 문자 그대로 보고, 생각하고, 이해한다. 그리고 관계를 지속한다.
p102.
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를 알기 위해 애썼던 십 대의 내가 거기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p104.
모든 고통에는 끝이 있다. 요가 수업은 스스로 고통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잠깐 죽었다가, 문득 눈을 뜨고 다시 밖으로 걸어 나오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p123.
새 시집을 펼치니, 그간 사막이 있는 더운 나라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시인은 '후회 없는 삶은 없고 덜 후회스러운 삶이 있을 뿐'이라고 적었다.
p137.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 밖에 없어서 괴롭다. 확실한 게 거의 없는데도 젊은이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채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만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하는데, 이렇게 내려진 결정들이 모여 확실성만 남아 있는, 더는 아무것도 바꿀 게 없는 미래가 된다. 청춘의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p139.
그 누구도 미래는 알 수 없다. 미래는 불확실의 영역이다(오직 죽음만이 확실한 미래다.) 이런 불확실성은 당연히 불안을 야기한다. 불안이 극에 달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너무 없다면 위험할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한 불안을 감수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p141.
그 학생들은 '하고 싶음'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의 마음. 나는 누구에게도 답을 주지 않았다. 답을 몰랐고, 알아도 줄 수 없었다.
p143.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p151.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도 아니다. 살아남은 자는 그냥 살아남은 자이고, 그 이유와 방법도 어쩌면 자신만 알거나 아니면 자기도 모를 것이다.
p169.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것이 일종의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른바 '도덕적 운'이다.
p185.
살아보지 않은 인생, 다시 말해 내가 살아갈 수도 있었을 삶이란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상과 비슷하다. 나는 거기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그게 전부다.
p192.
예를 들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그저 지구상의 인간을 위한 편의적 개념일 뿐이라는 설명이 그렇다. 또한 시간은 우리가 우주의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 다르고, 어쩌면 거꾸로 흐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같은 것.
p197.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조용한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라고 썼고 이는 그의 글 중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장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