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스포 있음)
좋아하는 가수가 새 노래를 발표하고 좋아하는 작가가 새 책을 내기까지의 시간. 힘들지 않은 기다림, 그것을 설렘이라고 부르고 싶다.
김영하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장편은 9년 만이라고 하니 짧지 않은 세월이다. 언젠가 내가 김영하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곱씹어 본 적이 있다. 타고난 이야기꾼의 세련되고 건조한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독후에 해소되지 않는 언짢고 불편한 느낌을 좋아했다. 그 불편함이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책들은 내가 느끼는 찜찜함의 근원을 고민하게 했고, 그 기분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시간을 통해 더 깊이 사색하게 만들었다. 어설프고 무책임한 희망 따위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생각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은 자고, 먹고, 출근하고, 아이를 키워야 하는 루틴에 갇힌 생존 기계가 아닌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책이 좋았다.
[작별인사]에 그려진 인류의 미래와 영생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 마지막 장에서 다루었던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더 브레인과 같은 뇌과학을 다루는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디지털 불멸을 변주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느 이야기가 그렇듯 살아있는 주인공의 입으로 그려진 세상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실재가 된다. 인간이 사라지고 자연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시간, 시베리아에서 철이와 선이가 함께 보낸 몇 년은 머릿속에서 동영상으로 재생되는 듯 생생하다. 그래서 더 시리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몸인가, 의식인가, 감정인가. 철이는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체세포 배아를 통해 제작되어 인간과 동일한 외형을 갖췄으며 인간처럼 먹고 자고 피 흘리고 배설하고 늙어간다. 그는 죽은 새를 묻어주며 마음 아파하고, 타인을 감정을 배려할 줄 알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삶에 의지를 지녔다. 더는 인간적일 수 없는 로봇이다. 선이는 인간 브리더가 장기이식을 위해 불법 복제한 클론이다. 목적을 위해 복제로 태어난 인간, 일반적 의미의 인간이 되기에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러나 선이의 마음속에 가득한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이야 말로 우리가 말하는 인간적임을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닌가. 이들의 선택과 삶 그리고 죽음. 우리가 그들을 그저 로봇이라, 클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 말할 수 있을까. 대체 인간이 무엇이기에.
지구 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병든 클론들과 고장 난 로봇들의 지도자로 죽어간 그녀, 의식을 가진 개인으로 죽고자 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자살. 죽음까지도 완벽하게 인간적인, 그러나 인간이 아닌 그들을 통해 작가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전작들이 우리에게 물음표를 던졌다면 이 책은 작가 스스로 질문에 대한 대답에 마침표를 찍은 느낌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잇는 것은 그것만으로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철이와 선이의 말들을 되뇌어 본다.
조금 더 부지런히 묻고 또 나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