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를 끊어?!
나는 무엇이든 잘 마신다. 아, 술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 잘 마신다고 해야 옳다. 물은 물론이고 커피와 각종 차, 하물며 한약이나 건강즙까지 액체로 된 것이면 일단 오케이다. 아침 방송 발 각종 건강상식을 두루 꿰고 있는 엄마가 나에게 하지 않는 유일한 잔소리는 하루에 물 2L 마시기 정도가 아닐까 한다.
특히 커피를 자주, 많이 마셨다. 연하게 오르는 증기와 함께 풍겨오는 향도 좋지만 카페인 섭취 후에 찾아오는 쨍하고 맑은 잠깐이 반가웠다. 신발끈을 조여매고 준비를 마친 듯, 120%의 능률은 거뜬할 것만 같은 그 순간이 필요했다. 낮에는 수시로, 주위가 깜깜해지고 나서도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는 날이 많았다. 내가 커피를 아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과감히 일주일에 두어 잔 정도로 커피를 줄였다. 위경련을 호되게 몇 번 앓고 나니 커피는 위의 적이라는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통증의 주요 원인이 커피인지 알 수 없고, 그렇다고 한들 일주일에 한두 잔이 대세에 지장을 주지 않을 거라는 비전문적 견해는 커피에 대한 간절함이 찾은 핑계 인지도 모른다. 금단 증상은 없을까, 커피 없이도 눈이 떠지고 정신이 맑아 질까. 진짜, 커피를 안 마셔도 하루가 살아지려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 커피 없이도 내 하루는 전과 똑같이 굴러가고 어쩌면 그 덕에 더 일찍, 깊이 자고 피곤함을 덜 느끼게 되었다. 카페인이 선사하는 정신 번쩍 드는 순간이 사라진 것은 아쉽지만.
걱정보다 카페인에서 수월하게 해방되었지만 수시로 음료를 마셔대던 습관은 남았다. 맹물을 마시기는 심심하고, 보리차를 끓일 정성은 없으니 아쉬운 대로 차를 주문하기로 한다. 물처럼 마실 수 있는 둥굴레며 현미차부터 각종 허브차 종류를 티백형과 잎차로 사들였다. 골라먹는 재미라도 필요했다.
커피는 커피머신으로 내리던 스틱형 커피를 물에 타던 손에 잔을 쥔 순간부터 마실 수 있지만 차는 다르다. 우러날 시간이 필요하다. 티백 봉지에 주의를 기울이기 된 것은 그 기다림의 시간 때문이었다. 잎차는 물론이고 각종 티백 봉지에는 차를 우리기에 적당한 물의 온도와 양,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직관적 이해를 위해 단순한 아이콘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커피처럼 홀랑 마시고 싶지만. 물 200ml와 250ml가 얼마나 다르겠어, 3분과 5분의 차이가 대단할 리 없지 않아? 싶지만. 밟아 본 적도 없는 대륙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란 찻 잎들이 저마다 다른 사인을 내미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기다려보기로 한다.
안내대로 우린 차가 월등히 맛과 향이 좋았으면 더 보람이 있으려나. 안타깝게도 그런 미각을 타고나지는 못해 사실 엄청난 차이를 느낄 수는 없다. 그래도 가능하면 물과 시간을 맞추어 차를 마시려고 한다. 그렇게 할 때 더 맛있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제 기다리는 시간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물을 붓자마자 맹물인 걸 알면서도 한 모금 마시고 보던 처음의 조급함은 사라졌다. 비싸서 가끔씩만 꺼내는 잎차를 마시며 그 향이 혈관을 타고 손끝까지 전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는데, 꽤 근사하다.
어쩌면 이제 그럴 때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커피로 몸을 깨워 하루를 시작하고, 잠을 쫓아가며 공부하고, 내 안의 능력치를 최대로 끌어올려 평가받아야 했던 젊은 날은 지난 것이다. 향기로운 커피 향을 참아내면서 더러 서운하겠지만 차가 우려 지기를 기다리면서 또 때로는 넉넉할 것이다. 더 이상 커피를 즐길 수 없는 몸과 나이가 된 것이 아니라 기다려 차를 마시는 즐거움도 알게 된 것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