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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봄 Dec 13. 2021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책의 구절 혹은 누군가의 말이 가슴에 확 꽂히거나 반대로 귓가에 닿자마자 튕겨 나온다면 (사실은 귀가 아니라 마음이겠지만) 시차를 두고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특정 주장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그 중요성뿐만 아니라 현재 내 상황과 심리상태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나의 입장이 바뀌면 같은 내용이라도 그 임팩트가 달라질 수 있고, 때에 따라 전혀 다른 각도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니 황홀해하며  마크해두었던 책 속의 문장들을 다시 읽으며 대체 왜(?)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분명 심드렁했던 영화나 책에 홀딱 빠져들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험은 좀처럼 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이긴 한데(우린 항상 바쁘니까. 좋지도 않았던 경험을 반복하기란 쉽지 않다) 극단적 평가를 하게 되는 경우라면 한 번쯤 시간을 내어볼 만하다.


 나에게는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가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였다. 3년쯤 전 이 책을 읽고 간단히 남긴 메모는 다음과 같다.

 

사람의 관심사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누군가에게는 그저 비를 피하고, 밥을 먹고, 몸을 누여 쉬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책 한 권으로 풀어낼 만큼 중요하고 철학적인 대상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저자의 학벌에 또 한 번 놀라고.

그럼에도 이 분야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건축은 가진 자들의 고상한 취미라는 빼딱하지만 지극히 서민적인 거부감일 것이다. 자연과의 조화, 인간을 위한 건축을 따지고 논하기에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하기도 벅찬 2018년, 30대가 씁쓸히 내뱉는 한숨.

도시 미관을 해치는 닭장 같은 아파트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네요 교수님.


 짧은 메모를 더 요약하자면, 그 대단한 건축이란 게 전혀 와닿지 않아요가 되겠다. 무릇 책이란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앎과 경험을 총망라하여 집약해 놓은 것일진대, 그런 정수를 읽고 내뱉기에 너무 성의 없는 문장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2018년의 나는 건축=집=부동산=재산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등식으로만 책을 읽어냈고, 상당히 삐딱했으며 꽤 두꺼운 책 한 권을 다 읽고도 전혀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다.


  첫 번째 독서 경험을 지배한 것은 순전히 내 꼬인 마음이었을 것이다.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받아들일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법. 2018년은 부동산 가격이 미친 듯이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집을 사야 한다는 내 조바심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그러니 공간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 도시와 인간의 공진화와 같은 저자의 설명은 공감은커녕 오히려 반발심만 자극할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 책을 다시 읽었느냐. 사실 그 이유는 딱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알쓸신잡의 출연자였던 저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감상이 저러했으니 기억나지 않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후 딱히 업데이트된 작가의 소식이나 계기가 없었으니  "그냥"보다 그럴듯한 설명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이유가 어찌 됐든 책을 다시 읽고 보니, 논리는 촘촘하고 전문적이지만 쉽게 풀어 설득력 있으며 정치, 문화, 세계사를 종횡무진 누비는 저자의 인문적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방송에서 보이는 저자의 시니컬한 화법을 떠올리게 만드는 문체 또한 매력적이었다. 그렇다면 현재는 집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에 귀 기울일 여유가 생긴 것이냐. 슬프게도 여전히 무주택자로 살고 있으니, 이 책을 다시 읽고 생각이 바뀐 것은 정말 "그냥" 우연이라 해야 한다.(포기는 때로 평안을 주기도 하지 않나!)


 공간이 인간의 관계를 바꾸고 나아가 사회 구조와 시스템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사실 머리로만 이해할  있을 뿐이다. 한옥에는 살아본 적이 없고, 마당 없는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너무 오래되었으며, 중정이 있고 층간 왕래가 자유로운 사옥에 근무한 적도 없다. 제대로  비교군이 없는 탓에 정말 그렇겠네 정도의 수긍이 전부다. 그러나 공간과 건축이 단순히 주거의 도구나 재산상의 가치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라는 생각의 변화는 분명 의미있다.  변화는 내가 사는 도시의 공간을 바라보고 소비하는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게  것이다. 변화를 이끄는 것은 입법이나 행정 혹은 저자와 같은 전문가들의 몫이겠으나 나와 같은 비전문적 독자들의 달라진 시각과 요구야 말로  변화의 바탕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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