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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봄 Nov 25. 2021

[긴긴밤]

나를 바다에 닿게 한 것은 우리가 함께한 긴긴밤이다

  버스에서 한 무리의 여중생들과 마주쳤습니다. 실상은 마주쳤다기보다 제가 혼자 슬쩍슬쩍 그녀들을 훔쳐본 것입니다. 교복은 아니지만 마치 교복처럼 보이는, 무채색 계열의 고만고만한 점퍼를 입은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난 지 숨 넘어갈 듯한 웃음을 연거푸 터트립니다. 버스 안 승객들을 의식한 듯 웃음을 참지만 이내 서로의 어깨와 등을 두드리며 큭큭대는 걸 보니 어지간히 웃긴 이야기인듯합니다.   


  아닙니다. 그녀들이 어떤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굉장히 사소한 이야기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누구네 강아지가 길가다 똥을 샀대. 정말? 푸하하 하하하. 누구누구네 고양이가 벽지를 다 긁어놨대. 진짜? 푸하하 하하하. 너무한가요? 여하튼, 정말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 겁니다. 그녀들의 웃음이 유난히 시끌벅적했던 것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함께였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피면 그녀들 사이에 비슷한 옷을 입고 큭큭대고 있는 내가 보일 것만 같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나와 함께 버스가 떠나가라 웃어대던 내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면서 감당해야 할 인간관계와 짊어져야 할 인생의 무게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버거워졌습다. 나 혼자만 감당하면 되는, 비교적 심플했던 삶은 이제 없습니다. 양쪽 집안의 경조사와 아직 어린아이들의 뒤치다꺼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연스레 다급하지 않은 일들은 뒤로 미루게 되기 마련입니다. 친구와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는 대신 아이들 밥을 챙기고 숙제를 점검해야 합니다. 친구와 영화를 보고 수다를 떠는 대신 아이들 학원 스케줄을 신경 써야 합니다. 학창 시절 은사님께 전화드리는 것은 미루고 아이의 담임선생님께 감사인사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하고 살면 좋으련만, 내 시간과 에너지는 제한적이고 그마저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고 변명해 봅니다.






  노든은 코뿔소입니다. 초식동물이고 초원에 살아야 합니다. "나"는 펭귄이니 남극바다에서 새우며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무리 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은 다르지만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 사막을 건너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요. 나이, 성별, 종교, 지지정당 따위가 같고 다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걷고, 춥고 긴 밤에 체온을 나누고, 누군가 함께 있다는 느낌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큰 지지가 될 수 있습니다.      


 [긴긴밤]을 읽으면서 내가 사막을 헤매며 만나고 함께 걸었던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나에게도 노든이 있습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코끼리 할머니와 앙가부도 있습니다. 유독 밤이 어둡고 길게 느껴지는 날에는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비슷하고 또 많이 달랐지만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았으니까요. 매 순간 기억하고 살지 못할 뿐 내가 지칠때 기꺼이 손을 잡아주고 등을 밀어 준 사람들 덕분에 나는 여기 있을 수 있습니다.


 나 역시 누군가의 노든이고 윔보이며 치쿠입니다. 우리는 함께였기 때문에 사막의 모래바람과 부족한 식량, 피로를 이기며 걸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가본 적도 없는 바다를 향해 가는 이 여정은 위험하고 불안하며 고단합니다. "나"가 마침내 바다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따뜻한 윔보와 용감한 치쿠 덕분이며, 서로에게 서로 밖에 없었던 노든이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긴 밤을 보내는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악몽을 지우고 잠들며 다시 힘을 낼 수 있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저기 지평선이 보여? 초록색으로 일렁거리는. 여기가 내 바다야.

나도 여기가 좋아요. 여기에 있을래요.

너는 펭귄이잖아. 넌 네 바다를 찾아가야지.

그럼 나 코뿔소로 살게요. 내 부리를 봐요. 꼭 코뿔소같이 생겼잖아요.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이리 와. 안아 줄게. 오늘 밤은 길거든.



  혼자가 아니기에 우리는 크고 작은 시련을 이겨내면서 사막을 건너고 있습니다. 오직 ""에게만 특정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까닭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바다를 찾아가는 수많은 ""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와 당신은 지금 함께 있는 노든과 함께였던 노든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노든이 되어주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영원히 곁에 있을  없더라도 함께 나누었던 시간과 이야기는 우리가 긴긴밤을 견뎌내는 힘이 되어  겁니다.


  그렇게 나와 당신이 사막을 넘고 벼랑을 올라 마침내 각자의 바다에 가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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