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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세평 Nov 18. 2019

남아공 유학 | 03. 기숙사에서의 첫 밤




기숙사에 처음 들어간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홈스테이를 했던 집에서 마지막 저녁을 먹은 뒤 짐을 옮겼다.


방 왼쪽 끝에 깨끗하게 빈 침대와 옷장이 있었다. 내 자리였다.

그 오른쪽으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틈을 두고 침대 두 개가 사이좋게 붙어있었다.

하얀 속커버만 덮인 무미건조한 내 침대와는 다르게

두 침대는 알록달록한 이불과 담요, 인형으로 장식돼 있었다.


나도 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다들 방과 후 스포츠 활동에 한창이라서 기숙사는 텅 비어있었다.


아무도 없는 기숙사는 고요했다.

홈스테이를 하며 혼자 방을 쓸 때는 라디오를 틀어뒀다.

한국에서 즐겨 듣던 '텐텐클럽'의 녹음본이었다.

같은 방송을 듣고 또 듣다 보니 거의 외울 지경이었지만

외로움과 향수를 달랠 유일한 방법이었다.


룸메이트들의 사진이 한쪽 벽을 가득 채웠다. 

협탁에 놓인 금발 머리칼이 꼬인 빗과 반쯤 빈 물병 같은 걸 보니 실감이 났다.

이제 정말로 24시간 영어를 달고 살아야 한다.

'텐텐클럽'으로 외로움을 달래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짐 정리가 끝나갈 즈음에 복도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직 숨이 좀 가쁜 대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방과 후 스포츠가 막 끝난 모양이었다.

이내 입구의 커튼이 확 걷히고 운동으로 붉어진 두 얼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두 친구는 내 맞은편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둘 다 나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 쌍의 눈이 호기심과 흥미로 반짝반짝 빛났다.

한 친구는 질문을 쏟아부었고 다른 친구는 익살스러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질문이 어찌나 많은지 내가 대답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당황스러웠지만 혼자 고요함 속에 파묻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질문이 많은 친구의 궁금증이 다하자 대화가 끊겼다.

내가 질문을 하거나 대화를 이끌어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어색한 정적이 우리 틈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때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대사가 떠올랐다.

마을 사람들의 인심을 사로잡은 비결이 뭐냐는 인민군의 질문에 한 촌장님의 답이었다.

'뭐를 많이 맥여야지, 뭐.'


룸메이트들에게 매운 것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 미소천사인 친구는 매운 걸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싸 온 신라면 작은 컵을 하나 꺼냈다.


취침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걸 먹고 자면 내일 아침에 눈이 붓는다고, 그래도 괜찮겠냐고 묻고 싶었다.

"이거 먹고 자면, 내일 아침에- (If we eat this and sleep, in the morning-)"

그런데 '붓는다'가 영어로 뭔지 몰라서 한참을 고민했다.

두 손을 양쪽 눈 앞에 대고 오므린 손가락을 펼치며 눈이 부푸는 동작을 하며

"눈이 커져. (Eyes become big)"라고 했다.


둘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동공만 왔다 갔다 했다.

내 말을 해석하기 위해 두뇌가 팽팽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다시 한번 얼굴과 눈두덩이 '이-만해진다'는 손동작을 했다.

"얼굴이랑 눈이 커진다고. Our face and eyes will become bigger."


미소천사가 뜻을 알아차리고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질문 천재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몰라 미소천사만 쳐다봤다. 설명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내일 아침에 눈이 붓는데. Your eyes get puffy in the morning."

한참을 웃던 미소천사가 질문 천재에게 설명했다.


'퍼피(puffy)! 붓는걸 퍼피라고 하는구나.'

"맞아. 눈이 부을 거야. Yes. Puffy. Eyes will get puffy."


둘은 눈이 붓는 것쯤은 괜찮다고 했다.


간이 부엌에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왔다.

매운 수프 냄새가 뚜껑 틈으로 모락모락 새어 나왔다.


친구들은 정말 먹어도 되는지 여러 번 되물었다.

아껴먹는 고향 음식인데 먹기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히려 맛만 보기도 양이 부족할 것 같아 미안했는데 말이다.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더불어 미지의 음식에 대한 약간의 걱정이 함께 서려있었다.


삼 분이 지나고 뚜껑을 열었다.

뜨끈한 김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몰고 올라왔다.

집에서 가져온 스테인리스 젓가락으로 면을 부드럽게 풀었다.

내가 먼저 먹는 시범을 보였다.

면을 한 젓가락 집어 올려 후후 분 뒤, 후루룩 입에 넣었다.

너무 뜨거워서 잇 틈으로 공기를 삼키며 친구들에게 젓가락이 꽂힌 컵라면을 넘겼다.


친구들은 작은 컵 입구 위로 머리를 맞대고 유심히 관찰하더니

똑같이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려 후후 불고 후루룩 먹었다.

생각보다 젓가락질을 무척 잘했다. 어쩐지 좀 서운할 정도였다.

나와는 다르게 젓가락을 훨씬 짧게 쥐었다.

일본에서 그러는 것처럼 입에 닿는 부분과 손이 가까웠다.


질문 천재는 세 입쯤 먹고는 너무 매워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미소천사는 태연하게 '하나도 안 매운데?' 하는 표정으로 

컵을 입에 대고 국물까지 마셔가며 잘 먹었다.

질문 천재도 포기한 듯 물을 연신 마시다가도 

한 번씩 미소천사 손에서 컵을 빼앗아 라면을 먹었다.


기숙사 방 안에 라면 냄새와 매운 음식을 먹는 소리가 가득 찼다.

음식이 매워서인지 몰라도 방에 훈기가 돌았다.

라면 용기는 금세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깨끗하게 비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빈 용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잘 준비를 했다. 

취침 당번이 소등시간을 알리고 불을 껐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친구들이 잘 자라는 인사를 했다.

영어로 하루의 첫인사와 끝 인사를 하게 됐다는 게 다시 한번 실감 났다.

나도 친구들에게 '잘 자'하고 말했다.


어둠 속에 보이는 천장이 무척 낯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라면 먹고 자서 눈 붓겠네.'

깨끗하게 빈 라면 컵 바닥이 떠올랐다. 낯선 침대가 조금 견딜 만 해졌다.

눈은 좀 붓겠지만, 기숙사에서 맞이하게 될 첫 아침이 꽤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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