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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Th on view Jun 17. 2023

Master of Scenes

로버트 카슨(Robert Carsen)과의 만남 

하나의 전시가 대중 앞에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려면 작품, 오브제, 공간 같은 구성 요소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를 바탕으로 어떤 레시피가 완성될지는 큐레이터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디자인하는 시노그래퍼(scenographer)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 무대 연출과 전시 디자인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캐다나 출신의 크리에이터 로버트 카슨(Robert Carsen)이 직접 들려주는 시노그래퍼의 세계.


공연 예술 무대,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다

공연 예술 속 장면을 일컫는 용어 ‘scene’과 ‘graphic’을 합성한 단어인 ‘시노그래피(scenography)’. 장르 간 융합이 보다 빈번히 이뤄지면서 주목받고는 있지만 다소 생소할 만한 개념이다. 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공연 예술과 시각 예술의 조우는 꾸준히 시도되어 왔다. 최근 사례를 꼽자면, 올해 초 파리 오페라 발레단과 웨인 맥그리거 스튜디오가 함께한 현대발레 공연 <트리 오브 코즈(Tree of Codes)>의 비주얼 콘셉트를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담당했으며, 20세기 미술의 거장 마르크 샤갈이 의상과 무대 디자인에 참여한 오페라 무대를 고스란히 재현해 낸 듯한 전시가 내년 1월까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지난여름 서울에 상륙한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 – 루이 비통> 전시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전시장을 ‘80일간의 세계 일주’ 무대로 탈바꿈한 로버트 카슨은 시노그래피의 세계에 궁금증을 품게 만든다. 사실 그는 시노그래퍼 이전에 오페라 감독으로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파리, 런던, 뉴욕은 물론 밀라노의 라 스칼라,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등에서 상연된 1백여 편의 공연을 이끌면서 늘 새로운 시도를 해온, 오페라계의 ‘혁신가’로 통한다.


오페라에서 패션, 순수 미술에 이르는 다방면의 활약

카슨이 전시 시노그래퍼의 길을 걷게 된 건 10년 전쯤. “2008년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마리 앙투아네트>전의 디자인을 해보지 않겠냐는 의뢰를 받았는데, 그게 시작이었죠.” 사실 그는 자신의 영역 밖의 일이라 여겨 이 제안을 여러 차례 고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카슨이야말로 적임자라면서 설득에 나섰다. 그렇게 해서 그는 전시 시노그래퍼와 오페라 무대 연출 감독이라는 ‘투트랙’으로 들어섰다. 2012년 그랑 팔레에서 열린 <보엠(Bohèmes)>전을 맡은 데 이어 2013년에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개최된 <인상주의와 패션(L’Impressionnisme et la Mode)>전의 디자인을 지휘하면서 크게 주목받았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은 당시 오르세 전시장을 방문했는데, 이를 계기로 카슨은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 – 루이 비통>전의 시노그래피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로버트 카슨(Robert Carsen). ⓒ Felipe Sanguinetti


다른 듯 닮은꼴의 미학

움직이지 않는 관객의 시선이 무대에 고정되는 공연 연출에 익숙한 그에게 전시 연출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관람객이 어느 갈래의 길로 어느 순서로 공간을 둘러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모든 방향에서 아름답게 보여야 하죠. 그 방법을 찾는 과정 그 자체로 기나긴 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극장에서 관객과 무대의 소통을 돕는 방식과 전시에서 관람객과 전시 공간을 연결하는 방식은 사뭇 닮았다. “각각 다른 형태의 이야기이지만 일종의 대화 형태를 띠고 있어요. 관람객이 오브제를 접할 때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하고 싶거든요.” 카슨의 손길이 닿은 전시는 극적인 장면 전환을 거듭하고 리드미컬하게 펼쳐지면서 변주를 이어나가는 게 특징이다. 서곡의 잔잔한 시작에 이어 아리아와 듀엣, 간주곡의 선율이 공연장 안을 차곡차곡 메우듯 그가 디자인한 전시에서는 매 장면이 대중의 기억 속에 켜켜이 쌓인다. DDP에서 열린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 - 루이 비통>전에서도 그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뮤직 룸은 합창을 연상시키는 구성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전시로 만나는 한 편의 여정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 - 루이 비통>전은 한국에서의 첫 프로젝트인지라 감회가 남달랐다. “전시를 한 편의 여정처럼 꾸미려 했습니다.” 카슨은 무엇보다도 큐레이터의 메시지, 즉 ‘여행의 발명’이라는 테마를 제대로 구현해 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모래사막을 배치하는가 하면 실제 높이를 방불케 하는 돛을 설치했는데, 일렁이는 파도 너머 항해하는 느낌을 주고자 각도를 튼 것은 그다운 섬세함을 반영한 디테일이다. “개인적으로 다음 장면이 예측되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시에서도 다음 공간이 미리 보이면 집중하지 못하게 되죠.” 전시장을 차례로 지나면서 금세 어느 방향인지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큰 규모는 오히려 그에게 창조적 자유를 줬다. 서울 전시에 이어 뉴욕의 옛 미국증권거래소 공간에서 지난 10월,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 - 루이 비통> 순회전의 막을 올린 그는 본연의 영역인 공연 연출 준비에 한창이다. 2017년 12월 공개되는,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열리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의 연출을 맡았기 때문. 하지만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든 그가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같다. 과거와 현재가 일맥상통하고, 예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바람이 그것이다. “우리가 극장이나 전시장에 가는 이유는 결국 우리 스스로를 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사람에 대해 배우는 거죠.” 


Style Chosun 2017년 Special Art + Culture 에디션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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