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로부터

"여행지의 흔적을 통해 기억을 곱씹는 것으로 여행이 다시 시작된다."

by eARTh on view

세계를 유랑하는 타고난 여행가를 막연히 꿈꾸지만, 실상은 익숙한 도시 속 미술관을 누비며, 아트 숍 혹은 서점에 들러 마음에 드는 작품이 그려진 자석 하나, 엽서 하나, 글귀 하나 차곡차곡 모아가는 잡동사니 수집가로서 사물을 보고 기록하는 방식을 터득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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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드로잉북 돌이켜보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어릴 적 나에게 수차례 혼란을 안겨주었다. 그가 여행길에서 만난, 낮 밤이 스치듯 머무는 소행성의 가로등지기는 성실함이라는 미덕을 미련 할치만큼 보여주었으나, 시간이란 개념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나에게는 수수께끼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주인공에게 양을 그려 달라 청한 어린 왕자가 여러 번의 거절 끝에 이 그림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만족하고, 잠결에 빠지려던 양을 위해 목소리를 낮추던 순간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평면 위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이 그림은 어느덧 어른의 언어에 서서히 물들어가던 나의 마음과 머리를 울렸다.


2009년 파리 마레 지구의 한 서점에서 팔던 이 "어린이를 위한 드로잉북"은 한동안 겹겹이 쌓인 (도저히 정리할 엄두가 안 나는) 짐 더미 속에 자리하고 있다가, 그로부터 10년 뒤, 이사를 계기로 다시 찾아냈다. 아니, 발견해냈다. 이제 액자 안 상자 속에서 숨 쉬는 양은 한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지는 일상의 리듬과 삶의 속도를 잠시나마 늦춰주고 있다.


나무 인형 알렉산더 지라드 디자인의 비트라 나무 인형은 파리를 찾을 때마다 잊지 않고 들리는 퐁피두센터 아트숍에서 만났다. 아마도 2014년이었을 것이다. 지라드의 나무 인형들은 으레 여럿이 한데 모여 있어야 어우러지기 마련인데, 형형색색을 뽐내는 인형들 사이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멀뚱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현혹되었다. 혼자서도 어디에서도 잘 어우러지겠구나 싶었다. 나무라는 소재와 톤 다운된 색깔이 주는 아늑한 편안함은 덤이다.


미니어처 의자 2019년, 국내 최초의 프랭크 게리 건축물 내 들어선 에스파스 공간의 오픈을 앞두고 주어진 휴식을 만끽하고자 떠난 여행길, 독일의 비트라 미술관에서 만난 미니어처 체어. 청담동에서 학이 너울거리는 사이, 물고기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닮은 게리의 곡선이 집 한 켠에서 춤추고 있다.


모빌 비트라 나무 인형과 함께 파리 퐁피두 아트숍에서 구매했던 모빌. 한동안 퐁피두 센터 앞 광장에 칼더의 대형 조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비록 칼더의 작품은 아니지만 여백 위에 줄타기하는 흑백과 세 가지 색채의 향연에 반하기까지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W 2020년 7월호 여행지로부터: 9명의 여행자가 꺼낸 23가지의 물건들을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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