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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외계인 Sep 28. 2022

소소한 베를린 일상, 9월


쏟아지는 강렬한 햇볕을 감당하기 힘들어 여기저기 그늘을 찾아다니기 바빴던- 늦은 밤까지도 밝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과 공원에 자리를 깔고 앉아 시원한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했던- 영원히 머무를 것 같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며칠 날이 흐리고, 비가 오며 슬슬 선선해지더니- 갑자기 가을이 와버렸다. 30도를 웃돌던 날씨가 갑지가 최고 온도 19도, 밤 사이에는 최저 9도까지 떨어지는 날씨로 급변. 베를린의 가을이 성큼성큼 예고도 없이 기습했다. 


해가 점점 짧아진다. 그리고 써머타임이 끝나간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일상은 흘러가고, 평온한 듯 보이는 일상에 예상치 못한 일들도 계속 생겨난다.




#베를린, 슬기로운 직장 생활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여름을 보냈고, 가을을 보낼 예정이다. 새로운 직장은 해야 할 일이 너무너무너무너무 많다. 그렇다고 야근을 하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말은 아니다. 디자인팀이 아직 초반 단계에 있는 상황이라 개선하고 발전시켜야 할 부분이 아주 많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이 내 도전정신에 불을 붙이고 있다. 


새로운 직장에 일을 한지 4개월 남짓 흘러가고 있다. 독일은 한번 직원을 채용하면 자르기가 매우 매우 어렵기 때문에 보통 6개월의 수습 기간을 갖는다. 그리고 수습 기간 내에는 2주 안에 상호 간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수습 기간에는 본인의 능력을 보여주면서도, 회사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힘을 쓴다. 그렇다고 눈치를 심하게 보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6개월간에는 좀 더 신경을 쓰는 정도. 


현재 나는 이미 많은 프로젝트에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수습 기간을 무탈하게 통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요즘 베를린 회사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장담을 하기가 어렵다.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코로나 상황이 장기화되며 전 세계적으로 경기가 너무나 안 좋아졌다. 틈새시장을 이용해 공격적으로 회사를 키우던 기업들도, 투자자들의 소극적 태도 돌변과 목표했던 기대 이익을 내지 못하면서 작년 말부터 많은 회사들이 대규모 해고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틈새시장을 잘 이용해 빠른 식재료 배달 서비스로 급 성장한 G사를 시작으로 최근 전 세계에 지사를 두고 있는 이커머스 W사는 9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 감축을 했으며, 베를린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스쿠터 회사인 T사도 최근 200명에 가까운 인원을 감축해야만 했다. 이 외에도 많은 기업들이 크고 작은 규모의 해고를 감행했다. 그 와중 많은 사람들이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W사의 경우, 네덜란드에서 베를린으로 W사에서 일을 하기 위해 리로케이션을 했던 직원이 입사 2주 만에 잘려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도, 베를린에 머무를 수도 없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다른 기업들에게 해고된 많은 인터내셔널 직원들 (워크퍼밋을 조건으로 거주 허가를 받은)이 단기간에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회사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된 나로서는 현재 베를린 시장에 일어나는 일들이 더욱 민감하게 느껴진다.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 시 이를 비자청에 알리고, 노동청에 알리고, 3개월 안에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하는 등등 다가올 후폭풍이 대량의 스트레스를 가지고 올 것이기에 그 상황을 마주하기가 싫을 뿐... 


다행스럽게도 새로 옮긴 직장은 비교적 동료들과도 빨리 친해졌고, 보스도 내가 진행하는 일들에 대해 신뢰를 보여주고 있어 현재까지는 만족스럽게 다니고 있다. 물론 모든 회사가 그렇듯 문제점도 있다. 디자인 쪽 인력이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이라 프로덕트 디자인에 있어서 중요한 많은 부분들을 놓치고 있는 점, UX 적으로 더 나은 대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택해야 하는 경우들도 있는 등등- 앞으로 개선을 해나가야 할 부분들도 아주 많다. 다행히 보스가 내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고, 최대한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부분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아직까지는 현 회사에 대해 긍정적이다. 무기한 계약이라 언제든 그만둘 수 있지만, 입사할 때 스스로 우선 1년은 다니자는 생각으로 들어왔으니 1년 후에 디자인팀 개선된 방향, 회사 내에서 개인적인 커리어 발전 등을 보고 회사에 남을지 이직을 할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듯하다.


아직 수습 기간이 2개월 남았기에 우선은 내 능력을 보여주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 간에 신뢰를 쌓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슬기롭게 직장 생활에서 이 정글 같은 베를린 시장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급여행 


방금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베를린은 직항이 없어 평소 아무리 비싸도 800유로 대면 왕복 비행기를 예매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1000유로 이상 지불해야 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러시아가 독일 에너지 공급을 막는 등,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아 모든 물가가 폭등하고 있는데, 비행기 가격에도 그 영향이 미친 것.


그래도 늘 그렇듯, 우울한 회색 겨울의 베를린을 피해, 춥지만 따듯한 가족 있고 햇볕이 있는 한국의 겨울로-! 그 외에는 남은 올해, 딱히 여행 계획이 없었는데, 급작스럽게 여행 계획이 들이닥쳤다.


지난달, 갑자기 현 직장 동료에게 문자가 왔다. 


"Are you interested in joining me a wedding in France?"


웬 뜬금폰가 싶어 물어봤더니, 자기 사촌에 프랑스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여행 겸 같이 갈 생각 없느냐는 것. 나에게 물어본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첫째, 이 친구의 와이프가 그녀의 가족 방문 관계로 동행을 할 수 없다는 것. 결혼하는 커플이 숙소를 제공하는데 +1까지만 가능하여 와이프의 가족까지 같이 갈 수가 없어서, +1 자리가 남은 것이다. 와이프를 두고 나에게 가자고 물었다는 부분만 보고 오해(?)를 할 수도 있겠으나 이 친구는 레즈비언이다.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멕시코에서 베를린으로 함께 이사를 와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귀여운 커플이다. 아무튼 와이프가 못 가게 되어 한자리가 남는데 굳이 나한테 물은 데에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이전에 동료들끼리 술을 마시며 내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아니 내 주변 친구들은 애를 낳고도 그냥 같이 살기만 하지 결혼을 안 해 ㅜㅜ 그래서 유럽에서 이렇게 오래 살았는데 유러피안 웨딩을 한 번도 못 가봤어 -_-..."


실로 내 주변 친구들은 커플 간에 아이가 있지만, 부부가 아닌 파트너로 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면 이미 나를 만나기 전에 결혼을 해서, 유럽의 결혼문화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이 얘기를 기억한 동료가 나를 떠올린 것. 그리고 덧붙여 하는 말 


"You are the only person I've met in Berlin who is crazy enough to join this wedding trip lol"


그러하다. 나는 나의 돌+I 기질을 나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나의 새 동료들은 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하-


무튼 "Sure, why not!"을 외치며 우리는 그렇게 급 기차표를 예매해 프랑스 여행을 함께 하기로 했다. 유일한 걱정은 나는 프랑스어도 스페인이도 할 줄 몰라 동료에게 "너 통역하다가 죽을 수도 있음"이라고 말하자, 축하 하객의 대부분이 남편 (프랑스 사람) 쪽 친구나 가족이 대부분이고, 어차피 자기도 신부도 프랑스어는 못하니 대부분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할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오케이- 


그렇게 급 프랑스 여행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여행 일정이 두 개 더 잡히게 되었는데...




#디지털노마드


현 직장은 1년에 최대 6주까지 리모트 워크를 할 수 있다. 그 이상도 할 수는 있으나 HR에 사유를 제출하고 서류 작업을 해야 하는 등 좀 귀찮은 과정들을 거쳐야 한다. 무튼 6주까지는 직속상관에게 보고만 하면 내가 원하는 곳에서 마음껏 일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조금 더 가족과 머무르기 위해 이미 한국에서 2주가량 재택근무를 하기로 결정. 보스가 이미 오케이를 했고, 나는 아직도 올해 4주가량 다른 곳에서 근무를 할 수 있는 기간이 남아있다.


집을 사랑하는 집순이인 나는 안정된 거처를 갖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다. 이러한 나에게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몇 개월에 한 번씩 거처를 옮겨 다녀야 하는 것이 깔끔깨나 떠는 나에게는 스트레스의 끝!


하지만 베를린에서의 삶이 길어지며 한 번씩 주변 환경을 바꾸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 새로운 회사에서는 재택근무나 리모트 근무에 제약이 많이 없는 편. 그렇게 파트타임 디지털 노마드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여행을 할 때 숙소가 꽤나 중요한 나는 숙소를 고를 때 까탈스럽기 그지없다. 물론 단기간 여행이라면 대강 아무 데서나 자고, 좀 불편해도 참고 그런 게 가능하지만 그것이 5일 이상 길어진다면... 그것은 나에게 재앙. 그래서 우선은 친구 찬스를 사용해 보기로 했다. 


"여행으로 아파트를 비우거나 혹은 방이 남아 1주일 정도 나에게 렌트를 해줄 의향이 있는 사람 손!"


그리고 두 명의 친구가 나에게 찬스를 제공했다.


먼저 가게 될 곳은 오슬로. 우연에서 시작된 인연으로 친구가 됐고, 역시 인생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나에게 일깨워 준 언니 R. 이 언니는 최근 오랜 기간 연애를 해왔던 남자친구와 결심을 맺어 오슬로에서 행복을 하게 살고 있다. 내 글을 보자마자 R 언니는 남편도 오케이 했다며 기꺼이 나를 환영해 주었고, 그렇게 나는 생에 첫 오슬로 방문과 더불어 파트타임 디지털 노마드의 첫 발걸음을 떼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티케팅을 마쳤고, 서로 오랜만에 얼굴 보게 될 10월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찬스 현 직장동료 A군. 스페인 출신의 프로덕트 매니저 A군은 내가 처음 현 회사에 입사했을 때 가장 도움을 많이 준 동료이다. 가장 가깝게 일하고 있는 동료 중 하나이기도 하고, 서로 성격이 잘 맞아 회사 밖에서 종종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사이. 여자친구들보다 더 말이 잘 통하는 게이인 이 친구는 올해 말 바르셀로나로 이사를 갈 계획을 잡고 있다. 미리 집도 알아볼 겸, 마침 비는 집에 있어 11월에 바르셀로나에 머무를 예정이라며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사촌이 바르셀로나를 떠나게 되어 집을 팔려고 준비 중인데, 뷰잉올 방문객들을 대신 받아주는 대신 그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집 규모도 꽤나 크고, 어차피 노는 집이라며 1주일 정도 같이 머무르며 바르셀로나 여행도 하고 그곳에서 같이 일도 하자는 제안! 이 대화를 나누던 중 옆에 같이 있던 다른 동료 두어 명이 더 조인하기로 했고, 그렇게 급 바르셀로나 갱이 형성되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하게 9월은 프랑스로, 10월은 노르웨이로, 11월은 스페인, 12월은 한국으로- 졸지에 한 달에 한 번 여행 일정이 잡혀버리게 되었다. 


여행 겸 일상생활을 하게 될 오슬로행과 바르셀로나행. 새로운 형식의 여행인만큼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다가올 날들을 기다리고 있다. 






예정에 없이 다이내믹해진 나의 2022년 하반기. 남은 올해도 '무사히'를 외치며 코로나 녀석도 요리조리 피해, 그러면서도 열심히 일해 슬기롭게 직장에서도 살아남기-로 잘 마무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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