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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영 earyoung Jan 24. 2024

날씨야 추워봐라 내가 옷 사입나 여행 가지

여름나라 가면 됨

  대학교 4학년 때, 4년 동안 과외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들고 스페인 교환학생을 갔다. 같이 다녔던 친구도 마침 나와 비슷한 액수의 돈을 모았던 참이었는데, 그 애는 그 돈으로 샤넬 백을 샀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샤넬의 클래식 백은 당시 400만원이었다.  그 작은 가방이 지금은 1,000만원에 육박한다고 하니 어쩌면 친구는 2020년에서 돌아와 ‘샤테크’에 성공한 회귀자일 지도… 예상했겠지만 그 친구와 나는 졸업하자마자 연락이 끊겼다. 400만원으로 유럽 여행을 하는 사람과 샤넬 백을 사는 사람의 간극은 지중해만큼 넓다.(생각해보라) 게다가 그 친구가 본인 블로그에 ‘400만원으로 여행하느니 샤넬 사는 게 낫다’는 논지의 글을 올리면서 그 간극은 지구와 달 사이만큼 벌어졌다.


  샤넬 백 대신 여행을 선택한 죄로 친구 한 명을 잃고(역시 예상했겠지만 아쉽지는 않다) 이후 10년 동안 나는 죽어라고 여행했다. 돈과 시간의 양은 정확하게 반비례하는 까닭에 취업 전에는 돈이 없었고, 돈을 벌고 나서부터는 시간이 없었다. 여하간 10년 동안 나는 들숨에 여행을 생각하고 날숨에 비행기표를 검색했다. 그리고 현재. 이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2023년 연말정산을 해보니, 여행 다니면서 쓴 돈이 1년 동안 번 돈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는 여행을 딱 한 번만 가기로 결심했다. 영하 15도의 칼바람에 몸을 옹송그려 걸으면서 들숨에 푸꾸옥, 날숨에 호주를 그려보긴 하지만…


  나는 지금도 샤넬을 사지 않는다. 매년 가격이 인상되는 샤넬 클래식에 질세라 매년 더 비싼 여행을 떠난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으로, 먹어보지 않은 것을 먹으러. 최근 2년은 프랑스, 이탈리아의 와인 산지들을 돌아다녔다. 어떤 마을(몬테풀치아노)의 하나뿐인 호텔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이탈리아의 한여름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가는 걸 몰랐던 나는, 냉장고에 넣어뒀던 생수병을 끌어안고 사우나 같은 열기 속에서 잠을 청하면서도 행복했다. 지금껏 보았던 어떤 예술작품보다 멋진 풍경이 허름한 호텔의 작은 창 안에 액자처럼 걸렸기 때문이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위로 새빨갛게 내려앉은 노을, 마치 눈으로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


  돌이켜 보면 서울에서 노을을 본 일은 손에 꼽는다. 사실 퇴근길에 꽤나 멋진 풍경을 맞닥뜨렸어도 휴대폰에 고개를 박고 지나쳤을 가능성이 크다. 일상 속 익숙한 장소를 여행지와 다르게 만드는 한 끗 차이는 내 준비성이다. 경외심이라는 마음을 일상에서 항상 꺼내 쓸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독이는 일은 쉽지 않다. 반면 여행을 떠나면 언제든 ‘감탄할 준비’를 장착하고 하나라도 놓칠까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그렇다면 평소에도 항상 준비된 자세를 견지해 일상을 여행으로 만들 수도 있겠다. 칼바람이 부는 서울을 뒤로 하고 5시간 25분을 날아가 푸꾸옥 어느 수영장에 드러누워 ‘치맥’을 먹는 것만이 진정한 여행은 아닐 것이다.(이렇게 믿어야 올해는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하간 ‘감탄할 준비 완료 상태’로 살아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매일 걸어다니는 불광천에서도 여행의 설렘을 찾을 수 있는 것, 그게 감히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렇게 글을 끝내면 아름답겠지만 이왕 자기합리화를 시작한 것, 좀더 가보기로 한다. 여행을 줄여야만 하는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멈추기로 결정한 건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행하면서 내가 정말 즐거웠나? 돌아보니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몇 년이나 발이 묶였다가 하늘길이 열렸고, 그때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여행을 다녔다. 어떨 때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도 기계적으로 인천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볼이 터질 것 같은데도 해바라기씨를 우겨넣는 햄스터처럼, 갈 수 있을 때 가자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뭐든 과하면 탈이 난다. 7월달에 2주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와서 시차적응도 채 마치지 못하고 다시 싱가포르로 떠난 후, 면역력이 박살 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세상에 암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볼이 빵빵하고 슬픈 햄스터가 되었다. 한 달 병가를 내고 수술을 했는데 다행히 암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도 아니었다. 여행하느라 몸이 너무 지쳐있었을 때 조직검사를 하는 바람에 암 소견까지 나왔던 것이다…


  암 얘기까지 나왔으니 정말 이제는. 기필코. 반드시. 여행을 줄이겠다고 다짐은 했으나 나는 오늘도 습관처럼 스카이스캐너를 켠다. 일상을 여행처럼 살 수 있는 방법(감탄할 준비 완료 상태)까지 찾아냈지만 아무래도 여행의 느낌적인 느낌은 진짜 여행을 가야 느낄 수 있다. 여행지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도 괜찮기 때문이다. 일상에서의 나는 하루 30분 단위로 할 일을 계획하고 실제로 한 일도 30분 단위로 적는다. 매일 스스로 세운 계획에 발맞추어 사느라 종일 가슴이 두근댄다. 집에서, 회사에서 맡은 역할을 잘해냈을까 걱정하며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본다. 하지만 이런 나도 여행지에서는 맘껏 풀어진다. (물론 분단위로 짜둔 촘촘한 엑셀 계획표를 소중히 품고 다니긴 하지만) 어차피 여행에서는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계획대로 안 된다고 해서 내 탓으로 돌릴 사람도 아무도 없다. 비싼 비행기삯 내고 먼 길 갔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여행지에서의 방종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여행의 미덕이다. 일상에서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글쎄, 시도는 좋았으나 실패로 끝났다. 결국 여행을 가야만 하는 이유로 끝맺는 걸 보니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올해도 샤넬은 못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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