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을 따르기까지 기다리는 시간만큼, 한 사람을 알아가는 시간
새벽 공기가 아직 서늘하다.
아침 출근길, 커피 한 잔을 들고 바쁜 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선다. 컴퓨터를 켜고, 오늘 만날 고객들의 프로필을 훑어본다. 서류 속 이름과 직책, 회사명은 익숙하지만, 정작 얼굴은 낯설다. 그들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어떤 말로 분위기를 풀어야 할까.
책상 위에 놓인 다이어리를 넘기며 혼잣말처럼 읊조린다.
"오늘도 조심해야 해. 신중하게. 하지만 너무 무겁게 다가가진 말고. 자연스럽게."
마치 와인을 처음 따는 순간처럼.
코르크를 뽑는 순간, 와인은 세상의 공기와 처음으로 만난다. 병 속에서 수년, 혹은 수십 년을 기다려온 와인은 마침내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마주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완벽한 순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와인은 시간이 필요하다.
병을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머뭇거린다. 향과 맛이 자리를 잡기 위해, 공기와 천천히 조우하기 위해. 성급하게 따자마자 잔에 따른다면, 우리는 와인의 모든 잠재력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강한 산도와 거친 탄닌만이 입안을 가득 채울 것이고, 그 뒤에 숨어 있던 부드러운 질감과 은은한 향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코르크를 뽑는 일도 그렇다.
언제나 긴장된다. 특히 오랜 시간 숙성된 와인이라면 더더욱. 무리하게 힘을 주면 코르크가 부서져버릴 수도 있다. 반대로 너무 조심스럽게 하면 마개가 병 속으로 밀려 들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한 병의 와인을 온전히 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적당한 힘과 여유, 그리고 기다림이다.
와인을 이해하는 것은 기다림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나는 그 기다림이 영업 현장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첫 만남, 그리고 침묵
요즘 나는 사람을 만나러 다닌다. 새로운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와인의 첫 모금처럼 낯설다. 저마다의 분위기와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말을 아끼고, 어떤 이는 유머로 시작한다. 어떤 이는 신중하고, 어떤 이는 단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와인을 건네는 소믈리에처럼 조심스럽다.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고른다. 혹시라도 잘못된 표현을 하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나아가 회사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까 두려워진다.
와인을 따르듯 말을 건네는 것도 쉽지 않다. 매 순간 고민하게 된다.
'아직은 공기가 부족한 것 같다. 상대방의 마음속에 산소가 스며들어야 하는데, 나는 너무 성급하게 잔을 채우려는 건 아닐까'
와인도 사람도, 첫 순간이 가장 어렵다.
'말을 건네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와인 한 병을 처음 마주한 기분이다.
회색빛 도로 위로 햇살이 희미하게 번진다. 도착한 미팅룸에는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고, 유리창 너머로 바쁜 도심이 보인다.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정렬된 서류들, 네이비 컬러의 정장을 빼입은 고객들, 간간이 들리는 노트북 타이핑 소리. 이 공간은 언제나 낯설고, 언제나 익숙하다.
나는 보통 와인과 마주하면, 잔에 따르기 전에 먼저 병을 살펴본다. 라벨을 읽고, 빈티지를 확인하고, 어떤 품종인지 가늠해 본다. 그렇지 않으면 한 모금 들이켰을 때 너무 떫거나 시큼해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상대와 미팅룸 안의 공기를 살린다. 아직 경험이 적지만, 기자 시절 수많은 이들을 만났던 데이터가 있으니 주눅 들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상대방이 어떤 성향인지, 어떤 말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먼저 읽어야 한다. 그에게 어울리는 말은 건네야 한다. 때론 친근하게, 때론 공식적으로, 때론 신중하게 하지만 아주 공손하게...'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말을 건다는 것은 와인 코르크를 따는 것보다 더 어렵다. 적당한 강약을 조절하지 않으면, 분위기는 어색하게 굳어버린다.
'제발 실수하지 말자.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내가 첫 잔을 따르기를 망설이는 동안, 테이블 저편에서 고객이 먼저 말을 꺼낸다.
"날씨가 덥네요. 요즘 비즈니스 하시기 어떠세요?"
순간, 와인을 따기 전 병을 손끝으로 살짝 굴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입을 뗄 수 있었다.
디캔팅이 필요한 시간
와인 중에는 병 속에서 오랜 시간 숙성된 것들이 있다. 이런 와인은 갑작스럽게 공기와 맞닥뜨리면 맛이 어색해진다. 향은 닫혀 있고, 맛은 날카롭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디캔팅’한다.
'디캔팅'은 좋은 와인이 공기와 만날 시간을 주는 것이다. 와인을 조심스럽게 병에서 카라프로 옮겨 산소와 천천히 만나게 한다. 그 과정에서 숨겨져 있던 향이 피어나고, 떫고 거친 탄닌이 부드러워진다. 병을 벗어나 카라프에 옮겨지면서 숨겨진 풍미가 깨어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서두르면 관계는 경직된다. 상대방이 나를 알아갈 시간을 주어야 하고, 나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천천히 읽어야 한다. 처음부터 너무 열정적으로 다가가면 오히려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
아직 몇 번 마주하지 않은 영업 현장이지만, 나는 매일 새로운 와인을 만나는 기분이다.
때로는 빠르게 다가가야 하는 고객이 있고, 때로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하는 고객이 있다. 단단히 닫혀 있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나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러운 흐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디캔팅’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성과를 내야 한다고 조급해하지 말자. 고객도 나도 아직 서로를 모른다. 천천히, 공기처럼 스며들어야 한다.'
사실 상대가 말을 많이 해줄 때면 너무도 감사하다.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거나, 시장 상황을 이야기하거나,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기대치를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럴 땐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디캔팅이란 결국, 와인과 공기가 교감하는 과정이다. 적절한 타이밍을 찾기 위한 기다림.
잔을 건네는 순간
나는 아직 서툴다. 영업은 처음이라 낯설고, 실수할까 조심스럽다.
하지만 와인을 마실 때처럼,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공기가 충분히 스며들 때까지 기다리고, 상대방의 스타일을 파악하며, 그들이 가장 편안하게 받아들일 순간을 찾으려 한다.
"이제 준비됐을까?"
와인이 충분히 숨을 쉬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잔을 들어 향을 맡는다. 그리고 그제야 첫 모금을 음미한다.
고객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충분한 교감이 이루어진 후, 나는 내가 준비한 제안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와인을 한 모금 삼킬 때처럼, 상대방의 반응을 조용히 지켜본다. 그들의 표정, 손짓, 눈빛 하나하나가 내 말이 얼마나 잘 전달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 순간, 마치 한 모금의 와인이 혀끝에서 퍼지는 것처럼, 내 말이 상대방에게 스며들기를 바란다.
그리고 가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야기, 좀 더 들어볼까요?"
그 짧은 한마디가 내겐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하는 첫 잔의 깊은 풍미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영업도, 와인도 결국 같은 것인지 모른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도, 와인의 맛을 온전히 느끼는 것도 조급함으로는 이룰 수 없다. 시간을 들여야 하고, 인내해야 한다. 첫 만남에서 완벽한 인상을 주려 하기보다는,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며 최적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
와인처럼, 천천히
나는 매번 서툴다. 영업이란 것은 낯설고,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와인을 배우듯, 나는 이 과정도 배워가고 있다. 매 순간 스스로에게 말한다.
'처음엔 어색하더라도, 공기를 만나면서 서서히 열리는 와인처럼.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적절한 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상대방의 기분과 분위기를 읽어야 하고, 필요할 때까지 시간을 들여야 한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와인과 사람을 함께 배워가고 있다.
좋은 와인은 시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충분히 기다린다면, 최고의 순간을 선물한다. 그리고 좋은 관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야 진짜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물론, 다음번 고객 미팅에서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는 걸 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다짐해도, 막상 고객사 담당자 앞에 서면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한 잔을 따르기까지 기다리는 시간만큼,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와인도, 영업도. 결국 중요한 것은 ‘조화로운 만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