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을지로 '20 어클락 모먼트', 한달에 한번 세남자가 모인다
을지로4가.
노후한 골목, 바랜 간판, 그리고 시간마저 조용히 숙성되어 가는 동네.
사거리 모퉁이 2층, 유리창 너머로 노란 조명이 은은히 번지는 와인 레스토랑이 있다.
《20 어클락 모먼트》
하루가 끝나고, 마음이 시작되는 시간.
그곳에, 오늘도 세 남자가 모인다.
샤또개비.
본명보다 닉네임이 더 익숙한 40대 중후반,
자칭 기획자이자 전략가.
“샤또(Château)”는 프랑스 와이너리를 의미하며, “개비”는 까베르네쇼비뇽(Cabernet Sauvignon)을 줄인 말로, 흔히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속칭이다.
인맥은 넓고 말발은 셌지만,
요즘 그의 하루는 마치
매번 다른 언어로 쓰인 시험지를 푸는 기분이었다.
새로 맡은 영업직무는 디테일의 연속이었다.
의도보다 결과가 중요했고,
사람보다 숫자가 앞섰다.
무엇보다 그는,
숫자 뒤에 감정을 읽는 데 익숙했지만,
이제는 감정이 아닌 수치로
사람을 설득해야 했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무대에서,
조용히 헤매고 있었다.
그덕에 그는 요즘 들어,
생전 처음으로 혼술을 시작했다.
그에게 혼술은 자기 자신에게 주는 작은 위로이자,
'아직 괜찮다'는 안심의 신호였다.
그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항상 자신도 모르게 주량을 넘기고, 결국 인사불성이 되고 만다.
그래서 40대 초반부터는 점점 술자리를 피하게 됐다.
어울림의 피로보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다.
그렇게 사람 대신
잔과 마주 앉는 시간이 늘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속엔 늘
하나의 로망이 있었다.
와인 한 잔으로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의 모임.
혼자 마시기엔 와인 한 병은 너무 많았고,
남기자니 아쉬웠다.
그 아쉬움이, 외로움보다 컸다.
어쩌면 그는, 잔을 기울이며 웃는 사람들 사이에
자신의 마음 한쪽도
살며시 놓아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샤블씨.
그의 말은 늘 논리로 시작해, 디테일로 마무리됐다.
쇼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의 줄임말인 "쇼블" + “씨”인데, 좀 더 세련된 발음을 위해 "샤블씨"로 부르기로 했다.
산도, 당도, 향의 흐름.
한 병의 와인에도
구조와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
그는 와인의 균형처럼,
삶도 그렇게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술에 강하다.
수십 잔을 마셔도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았고,
상황이 흐트러져도 그의 계획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말은 늘 정확했다.
불필요한 감정을 덧붙이지 않았고,
한 문장이면 사람을 설득했다.
그렇기에,
샤또개비를 위한 이 모임의 ‘설계자’도 그였다.
“9시에 택시 태워. 무조건.”
그의 말은 룰이 되었고,
그 룰은 이 모임의 유일한 규율이 되었다.
샤블씨는 오늘도 예외 없이,
계획대로 움직인다.
캄파넬라.
30대 중반.
말은 많지 않지만,
그의 한마디는 오랜 설득보다 더 깊다.
“고객의 마음을 읽고, 고객에게 필요한 것을 제안한다.”
원래는 이탈리아어로 ‘종’을 뜻하고, 철학자 야코포 캄파넬라를 떠올리게 된다. 부르고뉴 & 이탈리아 와인을 사랑하는 감성파 영업대표에게 어울리는 닉네임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그렇게 정의한다.
말보다는 눈빛과 공기의 온도로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
그는 늘 한 걸음 뒤에 서 있지만,
누구보다 먼저 진심을 알아차린다.
영업의 베테랑이기 이전에, 공감의 장인이다.
그가 고른 와인에는
언제나 사람을 데우는 감정이 담겨 있다.
와인은 그의 대화법이자, 마음을 전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탈리아 와인을 좋아한다.
부드러운 감정과 묵직한 여운이 공존하는 그 맛이,
어쩌면 그의 성격과 닮았다.
그는 프랑스 부르고뉴도 즐긴다.
향을 읽고, 잔을 고르고,
말 대신 감정을 붓는 사람이다.
때로는 한 잔의 와인에,
사람이 듣지 못한 위로를 담는다.
을지로의 작은 레스토랑 《20 어클락 모먼트》.
그곳에서 한 달에 한 번, 세 남자가 마주 앉는다.
까베르네 쇼비뇽을 고집하는 샤또개비.
화이트 와인의 산미로 세상을 설계하는 샤블씨.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디캔팅하는 캄파넬라.
그들의 모임은 우연히 시작됐다.
새로운 자리에서 연일 헛발질 중인 샤또개비.
그를 위해 샤블씨는 와인 모임을 제안했다.
그리고 감정을 읽는 베테랑 영업가 캄파넬라가
자연스레 그 자리에 합류했다.
이 모임에는 단 하나의 룰이 있다.
밤 9시까지 샤또개비를 택시에 태우지 못하면,
그는 다음 모임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최강야구처럼’,
지면 해체다.
세 얼간이가 잔을 들고 마주 앉은 순간,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삶은 은유가 된다.
그들은 와인으로 말하고,
말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하루를 조용히 붙잡아준다.
오늘, 당신의 인생에도
위로가 한 모금 필요하다면
함께 따라와도 좋다.
오늘 처음으로
세 사람의 잔이,
같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샤블씨는 시계를 본다.
19시 23분.
“1시간 37분 남았네요.”
그들의 '와인 연대기'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 잔 사이로,
어쩌면 오늘 하루는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른다.
《세 얼간이의 와인 연대기》, 그 첫 장이 열린다.
<1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