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 와인은 타협하는 게 아니라, 겹쳐보고, 들여보는 것
을지로 4가, 바랜 간판 아래 익숙한 길목.
노란 조명이 은은히 번지는 2층 유리창 너머로, 우리의 작은 성지 〈20 어클락 모먼트〉가 있었다.
하루가 끝나고, 마음이 시작되는 시간. 그곳에 오늘, 첫 장이 쓰였다.
택시는 이제 을지로를 벗어나고 있다.
샤또개비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다, 무릎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취하지 않았고, 오늘은 약속을 지켰다.
9시 택시. 무사히.
그 안에서 그는, 첫 모임을 조용히 떠올렸다.
어두운 조명 아래, 세 남자가 모였다.
창을 타고 흐르는 따스한 조명은
마치 먼 시간으로부터 흘러온 것처럼
테이블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아있다.
빛은 숨을 죽였고,
잔과 잔 사이에는 아직 말로 채워지지 않은 공기가 떠 있었다.
무언가 시작되려는 순간의,
조용한 떨림.
긴장이라기보다는,
조심스러운 기대 같은 것이 테이블을 감쌌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면서도,
아직은 완전히 마음을 풀어놓지 못한 채.
샤또개비가 취하면 안 된다는 건
우리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오늘은 그런 밤이었다.
술에 취하는 밤이 아니라,
기억을 빚어야 하는 밤.
그리고,
우리가 고르고 고른 오늘의 첫 번째 와인.
샤블씨가 샤또개비와 한참을 상의한 끝에 조심스럽게 택한,
실수 없는 선택.
오늘의 첫 와인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Seigneur de Lauris, Gigondas 2020.
라벨엔 “Vieilles Vignes”, 오래된 포도나무의 무게가 새겨져 있었다.
샤또개비는 잔을 들어,
조심스럽게 향을 맡고,
천천히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내뱉은 탄성...
“이건… 너무 맑아. 너무 착해”
그랬다.
향은 단정했고, 맛은 반듯했다.
깊이가 없진 않았지만, 무게감이 없었다.
마치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인데, 속이 비어 있는 것 같은 기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려나 싶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흐르고, 잔에 온기가 배어들 무렵—
지공다스는 조금 달라졌다.
조금 더 진해졌고, 붉은 과일의 농도도 진심을 비추듯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샤또개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술 끝이 말을 놓치지 못했다.
“그래도... 딱, 그 가격의 맛이야.”
그의 눈빛은 유리잔을 비추며 다시 어두워졌다.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딱 그 정도였어.”
가격을 알고 있는 와인을 준비한 샤블씨는 만족스럽다고 했다.
가격을 모르지만, 부드러운 와인을 좋아하고 즐기는 캄파넬라도
향과 바디감 어느 하나도 빠지지 않는 '지공다스' 와인이라고
가성비 좋은 와인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까베르네쇼비뇽 찬양자인 샤또개비만 심각했다.
차마 모두가 즐겁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첫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샤또개비는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입안 가득 맑은 시냇물이 흘러가는 느낌에 아쉬움이 컸다.
'분명 나쁜 와인은 아니지만,
내가 원했던 어떤 감정의 파고를 일으키진 못했다.
무난했고, 얌전했고, 안전했다.
오늘의 모임처럼.'
샤또개비가 조심스레 가방을 열었다.
오늘을 위해 직접 챙겨 온 세 개의 와인잔.
누군가는 그저 잔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샤또개비에게 이 잔들은,
와인의 시작을 결정짓는, 작은 의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세 잔 모두, 다이소에서 잔당 2,000원이면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평범한 유리잔.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들며,
마치 오래된 친구를 소개하듯
작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이 잔들은 단순한 유리컵이 아니었다.
어떤 고급 크리스털보다도 선명하게,
자신만의 취향과 기억, 그리고 와인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었다.
첫 번째 잔은, 보르도 스타일의 전형.
넓고 깊은 볼, 우아한 곡선.
와인의 숨결을 온전히 품어낼 줄 아는 Large Bordeaux.
레드 와인의 정석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잔이었다.
두 번째 잔은, 샤또개비가 가장 아끼는 스템리스 텀블러.
줄기가 없는 대신 손의 온기를 고스란히 와인에 전하는 잔.
덜어냈기에 더 가까워지고,
비웠기에 더 깊이 닿는...
그에겐 마치, 오래 함께해 온 친구 같은 잔이었다.
세 번째 잔은, 작고 가늘지만 단단한 존재감을 가진 플루트 글라스.
향을 날카롭게 끌어올리고, 잔을 손에 쥘 때마다 중심을 정확히 잡아주는 잔.
작지만 강렬한, 마치 숨겨진 이야기 하나를 조심스레 들려줄 것 같은 울림을 품고 있었다.
샤또개비는 말없이, 그러나 정성스럽게
세 잔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와인은... 어디에 담기느냐에서 시작돼. 같은 와인을 다른 잔에 담고, 시간의 흐름을 함께 느껴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테이블 위의 잔들이 아주 잠시,
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반짝였다.
에메랄드빛 벽면 위로 흐르던 부드러운 조명은
세 잔의 유리 표면에 잔잔한 빛을 얹었고,
금빛으로 둘러싸인 샹들리에는
마치 오래된 기억의 속삭임처럼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탁자 옆, 캄파넬라는 말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다 조용히 말했다.
“이 공간에... 오늘의 잔들이 너무 잘 어울리네요.
와인이 아니라, 잔이 먼저 공간을 채우는 느낌이랄까.”
샤블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버건디빛 와인이 담긴 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에게도 이 공간은 낯설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특별해 보였다.
벽면을 따라 세워진 와인병 너머의 어둠은
낮은 조도 아래서 무심히 존재하고 있었고,
그 아래에선 세 사람의 침묵과 미묘한 감정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샤또개비가 꺼낸 그 평범한 잔들이
이 공간과 오늘을, 조금 더 진심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20 어클락 모먼트〉는 그렇게,
배려와 취향 사이에서 조심스레 흔들리는
첫 번째 와인의 밤을 받아 안고 있었다.
샤또개비는
오늘의 첫 번째 와인을 준비해 온 세 개의 잔에 나눠 따랐다.
샤블씨는 처음엔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와인이 중요한 거지, 잔이 뭘 그렇게…”
하지만 한 입, 두 입,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모두가 느꼈다. 향이 다르고, 무게가 다르고, 감정이 다르다.
샤블씨는 그 순간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게... 같은 와인이라고?”
캄파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도 그렇잖아요. 같은 말도,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샤블씨도, 샤또개비도 와인 한 모금을 머금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모두가 잔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르나슈 60%, 시라 40%.
똑같은 비율, 같은 병.
하지만 잔이 달라지자, 감정의 온도도 함께 달라졌다.
샤또개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와인은 어디에 마시느냐에서 시작된다.”
캄파넬라가 조용히 가방을 열었다.
천천히 꺼낸 한 병의 와인.
라벨은 고요했고, 봉인은 단단했다.
그 순간 샤또개비가 웃으며 말했다.
“이탈리아 와인을 가져올 줄 알았어. 그런데 생떼밀리옹이라니.”
캄파넬라는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잔을 닦으며 말했다.
“오늘은 너의 밤이니까.”
그 말 한마디에
그가 와인을 고르며 머릿속에 그렸을 샤또개비의 얼굴과,
그 얼굴 위에 번지는 표정들까지
모두 담겨 있는 듯했다.
두 번째 와인을 맞이하며,
샤또개비는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고 첫 번째 와인에 대해 기록했다.
첫 번째 병, Seigneur de Lauris, Gigondas 2020.
라벨에는 “Vieilles Vignes”, 오래된 포도나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짧은 문장이 마치, 시간의 무게를 병 안에 눌러 담겠다는 조용한 선언처럼 느껴졌다.
프랑스 론 지역의 Domaine Aimé Arnoux에서 생산됐고,
그르나슈(Grenache) 60%, 시라(Syrah) 40%의 블렌딩으로 구성되어 있다.
포도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양조되며, 일부는 줄기를 제거해 부드럽게 눌렀고,
1/3은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숙성되며
검은 과일의 관능과 허브의 섬세함, 그리고 은은한 오크의 손길이 어우러졌다.
2020년 빈티지는
유난히 부드러운 탄닌과 긴 여운을 지녔다고 한다.
출시 직후에도 즐기기 좋고,
10년 이상 잠재력을 품고 있다는 평가.
하지만...
첫 잔은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향은 단정했고, 맛은 차분했다.
정제된 과일의 결이 혀끝에서 미끄러지듯 스쳤지만,
어딘가 감정을 꾹 눌러 담은 사람처럼,
끝내 자신의 본심은 드러내지 않는 듯한 기품이 있었다.
너무 맑았다.
맑음이라는 미덕이, 때론 거리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잔은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며, 와인은 조금 더 깊어졌다.
잔 속에서 온기가 돌고, 향이 넓게 퍼지자
붉은 과일의 그림자가 잔잔히 입 안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정해진 범위 안에서의 진화,
가격을 벗어나지 않는 계산된 여운이었다.
그 와인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은 너무 조심스러웠다.
한 걸음 다가오려다 다시 멈추는,
마치 누군가의 속내를 알 듯 말 듯한 그 순간처럼.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와인.
Les Hauts de Labrie 2020. Saint-Émilion Grand Cru.
캄파넬라가 오늘 밤을 위해 고른 선택이었다.
배려와 우아함이 조용히 배어 있는 와인.
85%의 메를로, 15%의 카베르네 프랑.
부드러움과 구조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블렌딩.
14개월간 오크통에서 다듬어진 와인.
병이 열리고,
잔 안으로 검붉은 과실의 깊은 향과
바닐라, 젖은 흙, 그리고 아주 미세한 미네랄의 흔적이
조용히 피어올랐다.
샤블씨는 향을 맡고, 한 모금 머금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꽤 괜찮은 구조야. 중반부 밸런스가 좋다.”
캄파넬라도 잔을 들어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은 첫 모임이잖아.
무난하되, 진심은 담고 싶었어.”
그리고 샤또개비.
빛 아래에서 잔을 천천히 돌리고,
그 안의 어두운 그림자를 한참 바라보다
작은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지공다스보다는 확실히 무게감이 있어.
향도 좋고, 입안에 맴도는 깊이도 있긴 해.
근데… 목 넘김에서, 살짝 무너지는 느낌이야.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끝까지 나를 붙잡진 못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테이블 위 공기가 조용히 바뀌었다.
아무도 말을 잇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테이스팅 메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한마디는,
오늘의 와인을 넘어, 오늘의 분위기와,
오늘의 대화,
그리고 우리가 감추고 있던 마음의 여백까지 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배려는 때때로 향을 가리고,
진심은 너무 조심스러우면 닿지 못한다'
셋은 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그 눈빛 안엔
와인보다 오래 남을 무언가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 병의 와인.
하나는 너무 맑았고, 하나는 너무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셋 모두가 깨달았다.
오늘 우리가 마신 건,
와인보다 배려였다.
한 달 뒤.
다음 모임을 기약하며, 우리는 약속했다.
"다음엔, 각자 진짜 좋아하는 걸 가져오자."
다음엔, 우리 각자의 진짜 취향을 공유했으면 했다.
서로를 배려하기보다,
각자의 향이 흐려지지 않는 방식으로.
와인처럼 있는 그대로.
와인의 향은,
누군가를 맞추기 위해 희석될 수 없다.
'와인은
타협하는 게 아니라,
겹쳐보고, 들여다보는 것이다'
택시는 성수 쪽으로 조용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불빛들 사이에서,
샤또개비는 마지막 글을 적었다.
“지공다스는 가볍게 다가왔고,
라브리는 조용히 물러났다.
오늘 우리는 두 병의 와인을 마셨지만,
결국 남은 향은 하나였다.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한 선택이라는 따뜻하지만 흐린 향."
오늘의 진짜 와인은,
병 속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셋이 나눈 잔들이었고,
그 잔 안에 담긴 서로의 배려였고,
묻어나는 취향과, 조심스러운 마음의 이야기였다.
잔 하나 바꿨을 뿐인데,
와인은 다른 옷을 입은 듯 향이 달라졌다.
그처럼, 사람도.
같은 시간 안에 있으면서도,
다른 마음을 입고 있는 처럼.
다른 잔.
같은 와인.
그러나 그 안에서 피어나는 서로 다른 세계.
샤또개비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와인은 비싸다고 좋은 게 아니야.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걸 매번 양보하는 것도… 좋은 건 아니지."
샤또개비는 생각했다.
'오늘은 배려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향이 흐려졌고,
마음도 흐려졌다.
와인은,
사람이 자기 취향을 말하는 용기인데
우리는 잠시, 그걸 잊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한 달 뒤 우리는,
〈20 어클락 모먼트〉에서
또 한 번, 각자의 병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향들이 머물고, 시간이 천천히 발효되는 우리의 작은 우주.
서로의 잔을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더 천천히, 더 깊게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오늘보다 더 진한 다음을 위해.
우리는 다시,
조금 더 우리 다운 향기로
만나게 되길...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