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또개비 꼰대력에 공학도 샤블씨가 '과학'을 들고 나섰다
비가 내릴 듯 말 듯한 날씨는
언제나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든다.
쏟아질 듯 말 듯한 구름 사이로,
저녁의 빛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정확히 한 달만이다.
'20어클락모먼트'.
세 얼간이는
서로의 마음을 담은 와인과 함께
이곳에 모였다.
서서히 스러지는 노을빛,
오래된 책갈피처럼
세 얼간이의 눈빛 속에 천천히 스며들고 있다.
[온도계가 들어올 때, 기본이 시작된다]
샤또개비는 오늘따라 다소 근엄한 목소리를 낼 작정이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말야
우리는 와인을 마시면서 온도를 재볼 생각,
또는 굳이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그래야 할까를 고민하잖아.
그래서 준비했어.
우리라면!!!
그래도 한 번쯤은 경험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말야. 짜잔!!!”
샤또개비가 먼저 꺼내 보인 건
와인이 아니라, 온도계였다.
긴 목을 가진 하얀 조리용 온도계.
다이소에서 5,000원에 구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조리용 온도계!
하지만 이 자그마한 온도계가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샤또개비에게는
오늘 와인을 대하는 샤또개비의 '태도'이자
그가 지키고 싶은 '기본'에 대한
작지만 굳은 선언이었다.
샤블씨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고,
캄파넬라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형님, 저도 집에 이 온도계 세 개나 있어요.
근데 와인을 마시며 써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네요.”
그랬다.
우리는 알고도 하지 않는 것,
아니 때로는 알면서도 무시하는 것들이 있다.
기본이라는 이름으로부터 멀어지는 많은 순간들처럼.
그제야 샤또개비는 준비한 와인을 꺼냈다.
오늘의 첫 와인.
'텍스트북 나파 밸리 까베르네쇼비뇽 2022'
샤또개비가 세 얼간이들과 까쇼에 첫 시작을 함께 하고 싶었던 와인.
"텍스트북은 와인의 정석이라고들 하잖아. 마치 수학의 정석이 있듯이 말야"
샤또개비는 와인 라벨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보이지? 이 단정한 세리프체.
그 뒤엔 조나단 페이의 집념이 숨어 있어.
Hand-pruned.
Hand-picked.
Hand-sorted.
수작업, 수작업, 또 수작업.
와인은 기술이 아니라 손의 기억으로 빚어진다고 믿는 이의 결과물이지"
샤블씨가 숫자에 민감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형님, 이거 얼마 주고 사셨어요?”
그에게 와인은 언제나 ‘수치’로 접근하는 대상이었다.
가성비, 효율, 경제성.
그는 늘 과학의 눈으로 와인을 해석했다.
샤또개비는 조금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국에서는 30달러쯤이지.
근데 내가 처음 한국에서 텍스트북을 처음 맛본 가격은 10만 원대였고,
지금은 할인해서 6만 원대 더라고.
그래서, 준비했지.”
캄파넬라는 슬쩍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말했다.
“형님, 지금 검색해 보니 4만 원대도 있네요.”
그리고는 고개를 들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샤또개비는 빙긋 웃으며 잔을 들었다.
“내게 텍스트북은,
그 정도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했어.
오늘 이 와인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일단, 마셔보자고.”
그는 조심스럽게 코르크를 열고,
와인 병에 온도계를 꽂았다.
모두가 말없이 그 숫자를 바라봤다.
섭씨 19.9도.
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기본이라는 건, 이런 거야.”
텍스트북.
나파밸리가 낳은 모범생이자,
포도밭의 ‘정석’.
어떤 기계보다 사람의 손을 더 믿는 이 와인은,
AI가 세상을 재단하는 이 시대에
여전히 ‘인간’이 만들어야만 탄생하는 맛을 증명하고 있는 듯했다.
샤또개비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듯 중얼거렸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날것의 인성이 많은지 모르겠어.
기본이라는 단어가 자꾸 그리워지더라고.”
그에게 ‘기본’은
온도가 아니라,
사람의 자세였다.
텍스트북과 함께 허기진 배를 채우며
세 얼간이들은 한 달간 근황을 나눴다.
서로의 고민들, 생각들,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마다 고민하는 우리의 마음들을.
이야기는,
샤또개비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기본’이라는 화두는
어느새 대화의 숨결 속에 스며들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문득,
샤또개비는 스스로에게 넌지시 물었다.
‘우리는 지금 기본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과연 기본이란, 단 하나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일까?’
그 물음은
다음 와인을 마주한 순간,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끼안티클라시코와 치즈, 그리고 사람이 좋은 날]
두 번째 와인
캄파넬라가 준비한 이탈리아 FONTODI 끼안티 클라시코 2020.
붉은 벽돌색 라벨에 새겨진 고성의 그림이,
어딘가 오래된 회상처럼 잔 안으로 스며들었다.
샤또개비는 병을 조심스레 따르며 말했다.
“이 와인은... 텍스트북과는 다르게 맑아.
어쩌면 좀 더 가볍고 산뜻한,
그런 사람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
캄파넬라는
가만히 와인을 코에 대고 향을 맡더니
웃으며 속삭였다.
“형님, 이건 토마토소스랑 같이 먹으면 끝내줍니다.”
그리고는 생햄이 감긴 그리시니 하나를 집어,
아무 말 없이 내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 짠맛과 바삭한 질감,
이탈리아산 산지오베제의 산미와 어우러지며
내 입 안엔 어느새 유럽의 저녁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치즈 플레이트가 등장했다.
브리치즈 위에는 얇게 썬 아몬드가 얹히고,
올리브는 짙은 녹색의 윤기를 머금고 있었다.
정사각형 크래커들은 마치 수학 문제의 정답처럼 줄지어 있었고,
살라미는 시간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기본’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설명 같았다.
치즈 플레이트를 들고 온
20어클락모멘트의 사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세 얼긴이(?)들을 위해, 다시 꺼내게 됐습니다.”
모두가 환호했다.
기본을 지킨 와인에, 기본을 갖춘 안주.
우리는 그렇게 기본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때 캄파넬라가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여운은 컸다.
“와인도, 사람도…
오래 둘수록, 진심이 보여요.”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눈앞의 치즈보다
그 문장의 뒷맛을 더 오래 음미했다.
[코르크 vs 스크루캡: 봉인의 의미]
세 번째 와인은 갑자기 분위기를 바꿨다.
샤블씨의 선택이었다.
화려한 설명도, 정통성도 없었다.
샤블씨는 조용히 병을 들고 말없이 뚜껑을 돌렸다.
스크루캡.
'칙—'
스크루캡이 열리는 소리.
그 순간, 샤또개비의 눈매에 익숙한 주름이 하나 늘었다.
그 특유의 "꼰대력"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스크루캡은 말이야…”
그가 장엄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편하게 아무 때나 마시라’는 신호잖아.
테이블 와인이지, 테이블 와인.”
모두가 빵 터졌다.
캄파넬라는 물을 삼키다 기침했고,
샤블씨는 눈을 반쯤 감으며 말했다.
“스크루캡도 요즘은 꽤 괜찮은 와인에 쓰여요.
산화 방지도 좋고, 보관도 쉽고.”
그러자 샤또개비, 진지하게 꼰대력을 끌어올렸다.
“스크루를 마신다는 건 말이지,
그건, 와인의 정신이 아니라
소비의 편리함일 뿐이야.
와인은 ‘지금’ 마시라고 있는 게 아니야.
와인은 ‘기다림’을 마시는 거지.”
샤블씨는 말없이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잔을 들며 던진 한마디.
“그래도... 맛있으면 된 거 아닌가요?”
그 말에 순간,
모두가 잠시 말을 잊었다.
'와인이란 무엇일까.
기억일까, 감정일까, 철학일까.
아니면 그냥, 오늘을 함께 웃게 만드는 한 잔의 맛?'
사실, 코르크는
처음부터 와인의 일부가 아니었다.
17세기 이전까지는 기름이나 나무조각으로 병을 막았다.
코르크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봉인'이라는 철학이 생겼고,
그때부터 와인은 시간과 기억을 봉인하는 음료가 됐다.
반면, 스크루캡은
20세기 이후 실용을 위해 태어났다.
빠르고 간편하지만,
뭔가 '기억을 붙잡는 감성'은 덜하다.
코르크를 통해 와인이 숙성된다고 믿는
샤또개비에게 스크루캡은
아직은 생소한,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샤또개비는 생각했다.
'나는 아직 코르크를 믿고 싶다.
시간을 봉인하고, 기억을 천천히 푸는 그 느린 방식이 좋다
기억은 천천히 풀려야, 향이 남는다’
[샤블씨의 유쾌한 반격]
그리고 사건(?)이 일어났다.
샤블씨가,
이탈리아 FONTODI 끼안티 클라시코가 담긴 잔에
스크루 와인을 ‘조심스레’ 부었다.
그리고 샤블씨는
익살스럽게 환하게 웃으며 선언했다.
“정통 프랑스 와인도 다 블렌딩입니다!
블렌딩은 기본이자, 과학이에요~”
샤또개비의 꼰대발언이
결국 샤블씨의 도발을 부추긴 셈이 됐다.
샤또개비는 흠칫했다.
조금 전까지의 꼰대력은 주춤했고,
표정은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는 잔을 내려다보다 중얼거렸다.
“그렇게 보면... 사람도 다 똑같지.
같은 시대, 같은 나라, 같은 언어.
하지만 늘 있어.
기본을 지키는 사람, 기본을 무너뜨리는 사람.”
말은 철학적이었지만,
그 어조엔 장난기 반, 진심 반이 섞여 있었다.
캄파넬라는 치즈를 베어 물며 말했다.
“둘 다 맞는 거죠.
세상은 원래 좀 섞여 있어야 재밌잖아요?”
샤또개비는 아직 믿고 있었다.
와인은 그 ‘그대로’여야 한다.
그 신념은 오늘도 그의 마지막 코르크처럼
조용히 단단하게 잔 안에 박혀 있었다.
그렇지만 말이다.
이런 날은,
조금쯤은 섞여도 괜찮았다.
기억도, 우정도, 와인도…
가끔은, 섞였을 때 더 깊은 향이 난다.
그렇게 ‘두 번째 연대기’는 마무리됐다.
세 병의 와인, 세 개의 웃음, 그리고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지켜낸 '기본' 하나.
잔이 비워질 때쯤,
모두가 웃었다.
기억될 오늘의 향처럼,
그 웃음은 유난히 깊었다.
[에필로그 – 19.9도라는 마음의 온도]
밖은 여전히 흐렸다.
비는 내리지 않았고,
내릴 듯한 기색만이 창밖에 오래 머물렀다.
우리는 각자의 잔을 들고 있었다.
그 잔엔 단지 와인만이 담겨 있진 않았다.
샤블씨는 지난 한 달의 무게를,
캄파넬라는 말하지 못한 생각을,
그리고 샤또개비는,
‘기본’이라는 이름의 마음 하나를 담아 들고 있었다.
기본이라는 단어.
인성이라는 숙제.
그리고 기억이라는 온도.
19.9도.
그 온도는 단지 와인의 적정점이 아니라,
샤또개비가 오늘 지키고 싶었던 ‘존재의 기준’이었다.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조금은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가장 사람다운 온기.
요즘 나는 인간의 ‘기본’에 대해 생각한다.
날것의 인성들이 넘쳐나는 시대.
기본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말들.
그 속에서 나는 온도계를 든다.
“적정 온도는 언제나 존재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기억도, 와인도, 사람도 말이야.”
오늘의 연대기는 끝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언가 끝났다는 느낌보단
또 하나의 페이지가
조용히 넘겨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잘 익은 와인처럼.
아직 열어보지 않은, 다음 병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세 얼간이의 와인 연대기》 와인 모임 사전 신청 안내
“세 얼간이와 함께, 한 잔의 인생을 마시다”
올해, 단 한 번.
한 테이블에서 마주 앉아, 와인의 향과 온도,
그리고 인생의 농도를 나눌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밤이 열립니다.
프랑스 블렌딩 와인을 ‘기본’이라 외치는 잔소리꾼 샤또개비,
쇼비뇽 블랑에 인생을 건 과학주의자 샤블씨,
부르고뉴 & 이탈리아 와인을 사랑하는 감성러 캄파넬라.
서로 다른 와인 취향과 인생 철학을 가진 세 얼간이와 함께,
30명만이 함께할 수 있는 유쾌한 와인 연대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잔 속엔 단지 와인이 아닌, 이야기가 담길 것입니다.
[모임 개요]
- 인원: 단 30명. 이 숫자가 모이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 시간: 저녁 7시 ~ 9시 (2시간)
- 형식: 다양한 와인을 함께 테이스팅하고, 와인에 관한 깊고도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
- 회비: 3만~5만 원 예정 (준비되는 와인에 따라 최종 조정 예정)
[참가 신청 방법]
*** 30명이 모이면 바로 초대장이 발송됩니다.
- 보내실 메일 주소: sdjinny@naver.com
- 메일 제목: (참석 희망) 모임 참석 가능 요일/시간(인원수)
- 메일 본문 필수 내용:
참석 가능 요일과 시간/참석을 원하는 이유, 기대하는 점/요청사항/성함/회신 가능한 이메일 주소
"기억나는 밤은 많지 않지만,
그날의 와인만은 또렷했다."
그런 밤을,
이번엔 당신과 함께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 그 잔 위에 당신의 이름을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