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길 그리고 글을 마무리하며.
밴을 타고 와서 그런지 사비하 괵첸 공항과 달리 아타튀르크 공항은 정말 가까웠어. 벌써 도착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라 머릿속으로 뭔가 정리할 시간도 없었어. 공항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지 않았어. 두 번 이곳에 왔을 때 늘 붐벼서 이 큰 공항이 좁다고 느껴질 정도였는데 말이야. 아직 티켓팅까지 긴 시간이 남아서 공항 구석에 자리 잡아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어. 떠나는 공항은 늘 쓸쓸해도 다음 여행지가 있다는 사실이 그 쓸쓸함을 데려가 줬지만, 이제 다음 여행지가 없다는 사실에 쓸쓸함은 온전히 내 안에 스며들었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더 줄어가고 조금 쌀쌀해졌어. 그래서 따뜻한 커피도 마시고, 와이파이도 쓸 겸 카페로 갔어. 그러고 보니 유명한 터키 커피도 마시지 않았네. 커피 하면 다들 이탈리아를 떠올릴 만큼 가장 알려져 있지만 최초의 카페가 오스만 제국에서 생겼을 만큼 터키 커피 역시 역사도 깊고 유명해. 시기가 오래된 만큼 고전적인 방법인 물에 커피를 넣고 끓여 추출해. 일반적인 차를 끓여마시는 거랑 같지. 맛도 향도 매력적이라는데 아쉬워.
공항 카페에서 와이파이로 한국 소식을 접하면서 시간을 보내도 여행이 익숙해져 버렸는지 폰 안의 세상은 영 지루했어. 이제 공항 직원들이 다 퇴근하고 나처럼 기다림에 잔뜩 지친 몇몇의 여행객들만 의자에 누워 지루해진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너무나도 조용해진 공항에서 그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봤어. 사진을 그리 많이 찍지 않은 거 같았은데, 최고 화질로 찍어서 그런지 SD카드 두 개가 가득 찼어. 계획으로는 3개를 다 채울 예정이었지만 겨우 두 개를 채웠네. 아! 첫 번째 SD카드에는 피렌체와 베네치아 사진이 날아가 버렸지. 그 부분이 남았다면 더 많았을 텐데 아쉬워. 뭐, 그래도 기억에 남아있으니까.
50여 일 동안 많은 국가와 도시를 다녔어. 엄청난 폭풍 같은 일은 없어도 하나하나 특별한 경험이었어. 감기와 함께 날아와서, 카파도키아 열기구에서 본 풍경, 하얀 소금산 파묵칼레, 감기를 떠나보낸 쿠사다시, 이천 년 전의 그리스 로마 유적, 천재 미켈란젤로를 만난 바티칸, 아기자기한 친퀘테레, 두오모에서 본 피렌체, 물 위에 떠 있는 베네치아, 비 오는 날의 촉촉한 파리, 가우디의 열정을 본 바르셀로나, 왠지 친근했던 포루투, 더위 먹었던 리스본, 제 집처럼 편안했던 마드리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빈, 별 보고 싶은 할슈타트, 친절했던 자그레브, 엄마와 다시 가고 싶은 플리트비체, 자유의 도시 두브로브니크,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 프라하, 잠깐 연예인 기분이 들었던 이스탄불까지.
그리고 그 속에서 비행기 놓쳤던 일, 현지인들과 만나고 나눴던 대화들, 피곤한 야간 기차, 우연히 다른 나라에서까지 마주쳤던 이들, 소매치기하며 살아야 하는 꼬마들, 다양한 홍채색를 가진 사람들, 분리되는 기차, 난생처음 새똥 맞았던 날, 부서진 캐리어, 놓고 온 배터리 충전기, 사그라다 빠밀라아를 다녀오다 밤길 헤맨 일, 빗 속의 요정의 숲, 소원하던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피에타. 그리고 수많은 유적지와 명화, 문화재들.
조금 더 하자면 카파도키아에서 먹었던 항아리 케밥, 쿠사다시의 또띠아 케밥, 로마의 젤라또와 미켈란젤로 광장에서의 와인,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 파리의 빵, 바르셀로나의 상그리아와 치즈, 포르투의 프란세지냐, 리스본의 에그타르트, 체코의 흑맥이 다시 먹고 싶어. 먹는 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는데도 많이 다니다 보니 제법 되네. 아직도 많은 것들, 많은 일들이 생각나지만 자세히 하면 끝이 없겠어.
그 끝없을 거 같은 이야기들이 나의 주위에 머물다 보니 티켓팅 시간이 되었어.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공항에 긴 한 줄이 생겼어. 중국 항공이지만 한국인이 30%가 넘어 보였어. 긴 시간을 조금이라도 편한 자리에 앉아 가려면 긴 줄을 참아야지.
30분쯤 지났을까 너무나 지겨워서 앞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어. 내가 먼저 말을 걸다니. 그냥 뭐라도 하고 싶었던 거 같아. 티켓을 받고 확인하니 도착지가 인천이나 김포가 아니라 베이징으로 나왔어. 그러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 조금 들어 기분이 살짝 회복됐어.
늦은 시간이라 앞서 엄청난 기다림을 요구하던 입국심사는 얼마 걸리지 않았어. 이곳에서 아테나로 떠날 때 흑인 이슬람교도들과 공항 경찰들의 일도 생각났어. 그로부터 벌써 이렇게 지났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어.
자정이 넘었는데도 면세점들이 열려 있어서 구경하다 게이트로 향했어. 이곳에는 사람들이 가득했어. 이쪽이 더 안전하니까 다들 여기에 있었던 거 같아.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자고 있었어. 그러다 우연히 또 다른 한국인들이 내 옆에 앉았고, 또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어. 근데 내가 하는 말마다 사람들이 너무 재미나게 웃어서 조금 당황했어. 재밌으라고 한 거긴 하나, 내가 그렇게까지 재밌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 때문에 자고 있던 아이가 깰까 걱정하는 한 어머니에게 몇 번 혼났지. 결국 대화가 중지되었지만 덕분에 지겹지 않게 기다릴 수 있었어. 정말 여행 속에서 내가 조금 변했나 봐. 아마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많은 도움을 줘서 그런 거 같아. 여행이란 참 신기해.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출발. 출국 때와는 달리 아프지 않아 다행이었어. 자다 깨다 3끼를 먹으니 밤이 되어서 베이징에 도착했어. 동쪽으로 갈수록 시간이 추가되었으니까 시간이 점프한 듯이 흘려버렸어. 처음으로 중국도 와보는구나 싶었는데, 너무 뿌얘서 활주로가 보이질 않아. 여기서 착륙한다고? 라이언에어를 탔을 때 승객들이 착륙 시 손뼉 치던 때가 기억났어. 그들도 이런 느낌일까? 그 많은 비행기를 탔지만 너무 긴장됐어. 활주로 등이 보이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런 상황이 너무나 익숙한 듯 정말 깔끔히 착륙하더라. 안도감과 함께 베이징에 도착했어.
이곳에서 바로 환승하는 게 아니었어. 인천행은 바로 가고 김포행은 자고 아침으로 간다고 했어. 출국 전에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그래도 김포행이 편하기도 하고 워낙 싼 가격이라 그대로 타고 갔지. 그리고 언제 베이징에서 자보겠어. 호텔까지 제공해준다는데 자고 가면 더 편하지.
공항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나 사람들과 같이 공항에 나오자 활주로가 보이지 않던 이유를 알았어. 그건 황사였어. 정말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어. 사막의 모래가 황사의 원인이라는 것을 정말 실감했어. 모래가 씹히는 느낌이나. 그리고 호텔로 가는 버스 안에서 걸어갈 때마다 모래가 쓸리는 소리가 나. 보통 쌓인 게 아냐. 운동장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청소를 안 하는 기사도 참 대단하고.
30분 정도 가 호텔에 도착했어. 작은 호텔일 줄 알았는데 커서 놀랐어. 이 비행기 값에 오히려 손해가 아닌가 싶었던 것도 잠시, 역시나 트윈 베드라 모르는 이와 자야 했어. 호텔이지만 게하 느낌인가. 낯가림에 대한 걱정도 잠깐, 일행들이 홀수라 나만 혼자 쓰게 됐어. 와! 정말 나의 방 운은 너무 좋아~~ 너무 감사합니다. 방도 깔끔하고 컸어. 직원들이 영어를 못해도, 엄청 친절해서 좋았어. 역시 호텔이 좋아. 여러 생각에 잠이 좀처럼 오지 않았어.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 짓다가 늦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어.
얼마 자지 못했는데, 비행기에서 잤던 덕분인가 아님 호텔 덕분일까? 피곤함 없이 일어날 수 있었어. 모닝콜도 해줬지만 이미 일어나 있었어. 로비로 나갔더니 간단히 먹을 것을 나눠줬어. 아침을 잘 안 먹어서 바나나만 먹고 가방 안으로 넣었어. 호텔을 나와 항공사 버스를 타고 뿌연 아침의 베이징을 구경했어. 뭐든지 다 큰 거 같아 신기했지.
공항에 도착해 금방 한국행 비행기에 타니 한국어가 들려서 한국 간다는 것을 실감했어. 베이징에서 한국은 금방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 도착했어.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며칠간 서울과 경기도에서 오랜만에 사람들과 만나 여행했던 50여 일을 전해줬어. 그리고 KTX를 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가 반으로 쪼개졌어. 집에서 들고 갔던 동생 캐리어가 베네치아에서 부서져 게하 직원이 새로 사준 건데 말이야. 무사히 가지고 오지 못한 캐리어에 동생한테 미안하고 중간에 부서지지 않고 잘 버텨준 새 캐리어에 고마웠어. 이동 중에 바퀴도 아니고 이렇게 반으로 쪼개졌으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끝까지 다행이고 고마운 일들뿐이야.
쪼개진 캐리어와 가족들 얼굴을 보니 정말 여행이 끝났다는 게 실감 나고, 지난 유럽에서의 50여 일이 꿈같았어. 그때, 눈에 무언가 보였어. 내가 유럽에서 집으로 보냈던 엽서들이 이미 와있었어. 그러니 '정말 내가 다녀왔구나. 꿈이 아니구나'라고 실감 나고, 이유 모를 행복함, 깨달음, 성취감 같은 것들이 밀려오면서 지난 여행했던 일들이 다시 나에게 스며들었어. 오랜만에 엄마 밥을 먹으며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행복한 미소와 함께 있었던 일들을 전해줬어.
그렇게 다시 한국에서의 일상으로 돌아왔어.
지인들의 말처럼 모든 게 한 여름밤의 꿈같았어요. 그 꿈같은 기억 속의 저는 행복했어요. 아니, 늘 행복할 거예요. 그리고 지금의 전 그 기억을 꺼낼 때마다 행복한 미소를 지어요. 그런 축복을 준 모든 이들에게, 모든 것들에게 감사하고 또 고맙습니다.
과거는 한낱 지나간 시간에 불과하다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저는 '사람은 행복한 기억과 추억을 먹으며 살아간다'라고 생각해요. 유럽 여행은 제 삶의 양분이 되어주었고 제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비타민과 약이 되어주었어요. 살아가야 할 이유와 열정이 되어주었어요. 여러분들도 그런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겠지요. 혹시 제 기억이 여러분께 작은 비타민이 되었을까요?
'인생은 여행과도 같다'고들 하지요. 저에게 유럽 여행은 인생의 압축본 같았답니다. 몇 년 동안 겪어야 할 일들을 한꺼번에 겪었던 거 같아요. 평소 겪을 수 없었던 사람들과 사건들, 경험들로 인해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을 느꼈어요. 그래서 머리 식히러 유럽 여행 간다는 말은 믿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은 아마 집같이 자주 다녔거나 새로운 자극을 받으러 가기 위해서 일거예요. 머리를 식힐 틈이라고는 침대 위와 비행기 안 정도일 거예요.
낯선 장소, 낯선 사람, 낯선 시간, 낯선 문화. 모든 것들이 예상한 대로, 경험했던 대로 되지 않아요. 늘 새로운 자극에 다시 적응하고 다시 배워야 해요. 이런 것들이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겠지만 희한하게도 여행이라 즐거워요. 재밌어요!! 왜냐고요? 실수해도 괜찮으니까요. 다시 하면 되니까요. 정말 모르겠다면 다시 돌아가서 시작해도 되니까요. 그리고 잘 못 든 길이, 지체된 길이 더 재밌기도 하고, 원했던 것을 얻기도 하고, 원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을 얻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나의 선택이, 실수가 무섭지가 않아요. 정말 잘못했다면 후회하고 반성해서 깨달아 반복하지 않으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체감했어요. 물론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남들보다 운이 좋았기에 가능했던 여행 같아요.
여행을 마치고 많은 것들이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일상이, 낯가림이, 외국어가 돌아왔지만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려고 노력해서 그런지 마음가짐과 기억, 감정들이 그대로 남았어요. 그래서 조금 더 마음에 드는 자신이 된 거 같아요. 여행이란 인생의 압축본이자 몰랐던 모습을 알게 되는 걸음이에요. 여행은 제 삶에서 잘한 일들 중에 하나예요. 그러니 경험해보세요. 그리고 저에게 들려주시면 더 좋고요.^^
이 글을 1년 가까운 시간에 매주 쓰는 동안 스스로 만든 마감에 조금 힘들기도 하고, 인기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런 감정들보다 100배의 즐거움과 행복함이 있었어요. 좋았던 기억에는 웃으며, 나빴던 기억에는 짜증 내며, 슬펐던 기억에는 우울해하며 그때로 돌아가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글과 같이 여행해주신 분들이 있어서 신이 나 적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었다면 제 삶에서 잘한 일이 추가되겠지요. 친구에게 TMI를 말하듯이 하는 컨셉이라도 여행지마다, 날마다, 때론 학구적으로, 때론 감성적으로, 때론 이상적으로, 때론 일상적으로 저의 다양한 면을 보여드려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여겼어요.
글을 쓰는 내내 많은 고민들을 한 결과, 결국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라 생각했어요. 네, 제가 그런 사람이에요. 공통되는 부분도 있지만 사람마다 정의하고 생각하는 저는 너무나도 달라요. 저도 어느 정도는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상황마다 사용되는 모드가 있어요. 그리고 모든 게 처음인 여행이고, 글도 처음이니 다양한 시도를 했었고, 다양한 생각을 했던 그대로 보여드리려고 했어요.
그런 것들을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실력이 부족해서 전달하지 못한 게 아닌가 염려스러워요. 그리고 긴 글을 오랫동안 적다 보니 글이 좋아져서, 글에 대한 생각이 변한 거 같기도 해요. 또, 더 많은 사람들이 재밌었으면 한 마음이 변화를 준거 같기도 해요. 그나저나 사진 다루는 실력은 좋아진 거 같아요.^^
지금도 초고에서 많은 내용들을 지웠으나, 마지막이라는 것을 방패 삼아 또 긴 글을 남기게 되네요. 이제 정말 마지막인 거 같아서요...... 그럴 때마다 아쉬워도, 글이란 것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고, 다시 돌아가면 또 새롭고 다시 여행한다는 생각과 감정이 든다는 것이 정말 좋은 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많건, 적건, 크건, 작건 부족한 저와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브런치 관계자분이 하시는지, 알고리즘이 하는지 모르겠지만, 제 글들을 다음과 브런치 메인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했던 기억뿐만 아니라 제 글을 누군가가 본다는 생각에, 더욱이 한 명이라도 좋아해 준다는 생각에 여기까지 즐겁게 쓸 수 있었어요.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꾸벅^^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아요. 가봤지만 보지 못한 것도 많아요. 그리고 느껴보지 못한 것도 많아요. 그러니 또 가야겠죠? 그래서 전 또 좋은 것들을, 행복한 것들을 기억할 수 있는 여행을 갈 겁니다. 그때도 같이 가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