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아주 오래된 기억 중에 하나다. 이 기억을 하고 있는 경위는 얼마 전 조제라는 영화를 보았기 때문 일거다. 그렇다고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전역 후 팔 개월 가량 복학 기간이 남았다. 집 근처 하나로 마트 농수산물 코너에서 일을 했었다. 일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전동차나 지게차를 운전해서 판매가 된 과일과 채소를 창고에서 가져와 보충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선입선출을 하고 매대에 모양이 흐트러진 상품들을 보기 좋게 다시 정돈해 주는 간단하다면 간단한 일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사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샘솟을 때라 어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없나 찾아다니고 그랬다. 계장들에게 배운 과일의 종류나 채소들의 효능들은 내가 사람들을 찾아다닌 이유였다. 이 과일은 지금이 철이고 이렇게 고르는 게 아주 맛있는 녀석을 찾는 방법이죠. 이 채소는 살짝 데쳐서 먹으면 좋은 건 고대로 남고 좋지 않은 건 거짓말처럼 사라져요. 마지막에 된장이랑 참깨, 참기름이랑 같이 버무려 먹으면 얼마나 맛있구요. 엄마에게 자랑하니 엄마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무작정 도움을 주는 일은 상대방을 피곤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쉽게 분간하기란 갓 전역한 까까머리 남자아이에게는 어려운 숙제였다.
자주 오시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계절보다 얇은 옷차림에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 이 사람이다 싶어 뭐 도와드릴까요? 하고 말씀드리니까 인자한 미소로 가볍게 양손을 좌우로 흔드셨다. 다시 불편한 표정으로 가격표가 달린 과일들만 챙겨서 서둘러 가셨다. 그 후 아주머니는 자주 오셨지만 항상 편치 않은 표정으로 같은 과일만 가져가셨다. 불편의 이유를 알게 된 건 9월에 자두의 막바지 때였다.
빠레트를 정사각형으로 붙이고 그 위로 계속 쌓아 올려 큰 매대가 만들어졌다. 그 위로 자두를 쏟아 내면 옅게 새콤한 자두향이 식욕을 자극하고는 했다. 판매는 간단했다. 그람당 얼마씩 기계에 설정하고 달라는 만큼 자두를 담아 달아 가격표를 붙여드리면 그 가격표로 프런트에서 계산을 하면 되는 시스템이다. 불편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찾아오셨다. 처음 보는 중학생 아이의 손을 꼭 잡으시고 왔다. 아들이 자두의 가격을 물었다. 아이는 가격을 듣자 뒤돌아 어머니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다채로운 표정으로 수화를 하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관경이었다. 판매 촉진을 위해 확성기로 오라! 오라! 하는 계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냉동을 위해 부단했던 기계음도 들리지 않았다. 듬성듬성 지나다니던 주변 사람들의 모습도 흐릿하게 아웃포커싱 되었다. 잠깐 사이 대화 아니 수화가 오고 갔고 아이가 만 원어치 달라고 했다. 나는 어떤 대화를 한 거냐고 신기한 듯 물으면서 아차 혹시 내가 신기하게 물어본다면 아주머니에게 실례이려나 싶었다. 아이는 자두가 비싸서 만원만 산다고 말했다. 나는 뭔가에 홀리듯 하나로마트 입장에서 보면 폐급인 짓을 했다. 족히 2만 원어치를 담고는 만 원짜리 가격택을 붙여 드렸다.
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인자했다 느낀 미소는 아주머니가 비장애인들에게 해야 할 마땅한 표정이라 느끼신 것이다. 살아오며 체득한 데이터가 이 표정이 가장 트러블이 적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들에게 보였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아들에게 수화를 하나 가르쳐 달라고 했다. 손은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아직 얼굴은 준비가 덜 되었던지 삐걱거렸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미소를 드려야 해' 속으로 주문을 외며 또 한편으로는 내 표정이 혹시 측은한 마음에서 오는 어떤 동정으로 아주머니를 상처 입히거나 일말의 불쾌감을 주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웃었다. 내 진심은 분명 닿으리라 생각하며 오우거 같은 미소가 되었지만 아주머니는 비슷한 웃음으로 화답해 주셨다. 아주머니 세계에서 나는 기린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더 무서울라나.... 그래서 할 줄 아는 수화가 하나 있다.
"언제든 편하게 오세요."
K조제를 보며 참 연애세포가 몰살된 건지 원작에 대한 애착이 너무 큰 탓인지 모르겠다. 지극히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역시 나에게 멜로는 허진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