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잘하면 좋아하게 될까

지금보다 일을 잘하게 되면 나아질까

by 이지안

A 해외 공장의 인력 적정성 검토를 하는 과제가 떨어졌다. 분야별, 직무별로 인력을 효율화한다면 분야별로 몇 명의 인력 효율화가 가능한지 검토하는 과제였다. 주어진 기간은 이틀. 아마 올해 초에 이런 과제를 받았다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을 것이다. 어떤 기준과 방법으로 검토해야 하는지, 필요한 데이터는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비슷한 과제를 올해 여러번 수행하면서 (마음속으로 많이 울면서) 필요한 경험과 데이터를 축적했다. 덕분에 기간 내 무리 없이 자료를 완성했다. 일이 끝나고 '전보다 조금은 성장했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인사 분야에서 일하며 '이 일이 나랑 잘 안 맞나?'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일단 일이 어려웠다. 교육/조직문화에서 일할 때는 대충이라도 방향을 잡고 일을 할 수 있었다. 목적지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는 몰라도 목적지가 동쪽인지, 서쪽인지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사에 오고 나서 각종 프로젝트 - 직무분석, 적정인력 산정, 직급 개편, 주재원 보상제도 개편 등등 -에 투입될 때마다 막막함과 무력감을 자주 느꼈다. 한 발자국을 떼야하는데, 어느 방향으로 옮겨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선배들 도움이 없었다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일의 난이도 외에도 가치관의 혼란이 나를 힘들게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일에 관한 가치관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이다. 운 좋게도 회사 생활 초반에 맡았던 교육/조직문화 업무는 가치관과 업무가 일치했다. 교육/조직문화 업무의 효과성에 의문이 들 때도 있었지만, 과정과 의도는 항상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인사 일은 조금 달랐다. 회사 관점에서는 이롭지만 개인에게는 이롭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인력이나 인건비를 줄이는 일이다. (다행히 검토만 하고 실행까지는 가지 않은 일이 훨씬 많았다) 일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해야 했다. 날 선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쿵 내려앉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설득하는 것이 또 일이라 어떻게든 설명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했다. 일이니까 하지만 과연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감정의 불순물이 마음 한 구석에 조금씩 쌓여갔다.


그러던 차에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일을 주제로 한 영상을 봤다. 거기서 위로가 되었던 건 맹자에 나오는 화살을 만드는 사람과 갑옷을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화살을 만드는 사람을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을 사람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한다. 그렇다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이 타고나기를 갑옷을 만드는 사람보다 덜 선하겠냐는 이야기가 나와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갑옷을 만드는 일인가? 화살을 만드는 일인가? 그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해요"


일은 누군가를 해하기도, 지키기도 한다. 일의 성격과 맥락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일과 상관없이 일하는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굳이 맹자 이야기에 대입하자면 인사는 화살을 만드는 사람, 교육/조직문화는 갑옷을 만드는 사람의 일에 가깝다. 두 일의 성격은 다르지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하는 사람, 즉 나의 성향과 가치관 자체는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위로가 됐다.


또 다른 인상적인 이야기는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동진 씨는 둘 중에 어떤 일을 선택하라면 잘하는 일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욕망은 계속 변하기에 지금 좋아하는 일을 10년 뒤에도 좋아할 거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게 근거였다. 나는 원래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좋아하다는 감정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랬던 적이 많았다.


그러면서 들었던 또 다른 생각은 '잘하게 되면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처음 하는 일은 당연히 어렵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일정한 패턴과 해결하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고, 시간이 지나면 나름의 요령이 생긴다. 그러면 일이 처음보다는 쉬워지고 어느 순간에는 그럭저럭 할 만한 일이 된다. 일이 손에 붙어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면 주변에서 좋은 피드백도 생긴다. 그러면 처음에는 관심 없던 일도 관심이 생기고 점차 내 일처럼 느껴지게 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지금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지는 인사 일도 일단 내가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입안의 가시처럼 까끌거리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 일을 편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능숙해지면 일에 대한 감정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잘하면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참고자료

-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이동진이 걸어온 일의 여정... 일이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OOO을 찾아야 하는 이유>




keyword